동서양을 넘나들며 문학과 철학 그리고 종교를 아우르고 창작과 비평을 실천한 보기 드문 수재, 이념의 틀과 관습을 거부하고 자기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한 자유인, 특히 언어에 남다른 감각을 가지고 언어로 인간과 문명을 통찰한 언어의 마술사, 교수로서 행정가로서 한 시대를 풍미하며 한국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
어떤 이는 이어령의 그 호방함과 자유자재의 상상력에 찬탄하며 천재라고 칭하는가 하면, 언어의 현란함만 있을뿐 어느 하나에도 정통하지 못하고 양지만 쫓아다닌 재승박덕한 인물쯤으로 치부하는 시각도 있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어느 누구도 완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 이어령에 대해 호불호가 있고 양면적 평가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치열한 삶과 죽음을 마주한 상태에서 들려준 그의 육성은 옷깃을 여미게 하는 비장함과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게 하는 지혜를 가득 담고 있다.
이 책에서 제기한 문제를 일목요연하게 제시하기 쉽지 않지만,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하 볼 수 있을듯 하다.
삶과 죽음
주체적 사유의 문제: 타자의 절대성 인정
거대담론의 맹점: 디테일이 중요하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
진실 마주하기: 진실의 반대는 거짓이 아니라 망각.
운명의 문제
평생 배워야 한다
자유인으로서의 삶
바보로 산다는 것
자기다움에 대해:자기무늬 만들기
고통, 고난이 삶의 통찰을 길러준다
다양성, 포용의 중요성
눈물 한방울
지성에서 영성으로
인간은 예외없이 죽는다는 직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사실을 직시하면서, 이어령 교수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나답게 산다는것, 내가 내 삶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 자기만의 무늬를 가꾸는 일이 중요함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진정한 스승을 만나기도 어렵거니와 진정한 제자, 제자다운 제자도 부재한 불행한 시대.. 추악한 욕망만이 이글대고 철저하게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세태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던 차에, 이어령 교수의 <마지막 수업>을 읽고 새로운 삶의 의지를 다지게 되었다.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철저하게 나를 내 삶의 중심에 놓고 나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또 다시 마음을 다져 본다.
● 이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구절을 일부 정리해 보았다.
민주주의의 평등은 생각하고 말하는 자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거라네. 그 사람만의 생각, 그 사람만의 말은 그 사람만의 얼굴이고 지문이야. 용기를 내서 의문을 제기해야 하네. 간곡히 당부하네만, 그대에게 오는 모든 지식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지 말게나.”
내가 여러 번 얘기하지 않았나. 덮어놓고 살지말라고, 왜냐면 우리 모두 덮어놓고 살거든, 덮어놓은 것을 들추는 게 철학이고 진리고 예술이야.
덮어놓은 것을 들추지 않은 것에 대해 요즘 깊이 반성하고 성찰하고 있어요. '좋은게 좋은거야.' '괜히 이야기했다가 관계만 더 악화될거야.' 하면서 묵인했던 것들이 큰 바윗덩어리가 되어 덮치더라구요.
시한부 삶을 선고받을 때 인간은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가르쳤던 정신과 의사 퀴블러 로스. 그토록 오래 죽음에 훈련된 사람도 보통의 인간들처럼 부정과 분노로 출발해서 똑같은 절차를 거쳐갔다니. 철창 속의 호랑이와 철창 밖의 호랑이라는 말에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죽음 앞에 인간은 얼마나 몸서리치게 작은가.
"고통 없는 죽음이 콜링인 줄 알았나? 아니야. 고통의 극에서 만나는 거라네. 그래서 내가 누누이 이야기했지. 니체가 신을 제일 잘 알았다고 말일세. 신이 없다고 한 놈이 신을 보는 거라네. "
"재미있지. 배꼽을 만져보게. 몸의 중심에 있어. 그런데 비어 있는 중심이거든. 배꼽은 내가 타인의 몸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물이지. 지금은 막혀 있지만 과거엔 뚫려 있었지 않나. 타인의 몸과 내가 하나였다는 것. 이 거대한 우주에서 같은 튜브를 타고있었다는 것. 배꼽은 그 진실의 흔적이라네. 혹 배꼽이 아무 쓸모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누워서 몸 위에 찻잔을 놓아보게. 어디에 놓을 텐가? 이마? 코? 아냐. 배꼽밖에는 없어. 비어 있는 중심이거든. 가장 중요한 것은 비어 있다네. 생명의 중심은 비어 있지. 다른 기관들은 바쁘게 일하지만 오직 배꼽만이 태연하게 비어 있어. 비어서 웃고 있지."
인간은 세 가지 부류가 있다네. 개미처럼 땅만 보고 달리는 부류. 거미처럼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사는 부류. 개미 부류는 땅만 보고 가면서 눈앞의 먹이를 주워먹는 현실적인 사람들이야. 거미 부류는 허공에 거미줄을 치고 재수 없는 놈이 걸려들기를 기다리지. 뜬구름 잡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학자들이 대표적이야. 마지막이 꿀벌이네. 개미는 있는 것 먹고, 거미는 얻어걸린 것 먹지만, 꿀벌은 화분으로 꽃가루를 옮기고 스스로의 힘으로 꿀을 만들어. 개미와 거미는 있는 걸 gathering 하지만, 벌은 화분을 transfer 하는 거야. 그게 창조야. 여기저기 비정형으로 날아다니며 매일매일 꿀을 따는 벌! 꿀벌에 문학의 메타포가 있어. 작가는 벌처럼 현실의 먹이를 찾아다니는 사람이야. 발 뻗는 순간 그게 꽃가루인 줄 아는 게 꿀벌이고 곧 작가라네.
뜬소문에 속지 않는 연습을 하게나. 있지도 않은 것으로 만들어진 풍문의 세계에 속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또물어 진실에
가까운 것을 찾으려곤 노력해야 하네, 그게 싱킹만 thinking man이야
생각이 곧 동력이라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중력속의 세상이야.
바깥으로부터 무지막지한 중력을 받고 살아. 억압과 관습의 압력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생각하는 자는 지속적으로 중력을 거슬러야 해. 가벼워지면서 떠울라야 하지 . 떠오르면 시야가 넓어져.
자기 삶이 사소하면 사소한 대로 비루하면 비루한 대로, 정직하게 기록하는 인간들이야 말로 담대한 사람들이죠.
호기심 많은 한 놈은 ~ 저 홀로 낯선 세상과 대면하는 놈이야 탁월한 놈이지. 떼로 몰려다니는 것들, 그 아흔아홉 마리는 제 눈앞의 풀만 뜯었지. 목자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닌 거야. 존재했어? 너 존재했어 ? 너답게 세상에 존재했어? 너만의 이야기로 존재했어?
돈이 없으면 시장이 성립이 안 되고, 피가 없으면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생길 수 없고, 언어가 없으면 사상이나 정의, 선, 가치는 다룰 수 없겠지.
배신하는 놈은 평소 믿었던 사람이야. 극한에 몰리지 않으면 인간은 모르는 거라네.
인간은 고난을 통해서만 자기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 그 모습이 비참이든 숭고든. 고난이라는 실전을 통해서만.
남의 신념대로 살지 마라
방황하라
길 잃은 양이 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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