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8일 뮤지컬 <하데스 타운>을 관람했다. <하데스 타운>은 2019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었으며, 같은 해 토니어워즈에서 뮤지컬 부문 15개 중 14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고 이중 최우수작품상을 비롯한 8개 부문을 수상했다. 한국에서 초연되는 작품인데다 그리스 <오르페우스>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뮤지컬화 한 것이어서 관심을 갖고 있던 차에, 이번에 관람하게 되었다.
작품에 관한 사전 정보가 없어도 감상하는 데 별 문제는 없다. 그렇지만 창작 기반이 된 <오르페우스 신화>가 어떤 이야기인지 <하데스 타운>은 이를 어떻게 변용하고 재창조했는지 살펴 본다면 작품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
신화 줄거리는 이러하다.
오르페우스의 사랑하는 부인 에우리디케는 어느 날 독사에 물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슬픔에 빠진 오르페우스는 부인을 다시 찾아오기 위해 지하세계를 관장하는 하데스와 부인 페르세포네 앞에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했다. 이에 탄복한 하데스 부부는 에우리디케를 다시 데려가는 것을 허락했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다. 지상세계에 도달하기 전까지 오르페우스는 앞장서서 걸어야 하며, 빛을 보기 전까지는 뒤따라가는 에우리디케를 절대 돌아보면 안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만일 금기를 어기면 부인은 다시 지하세계에 영영 갇히게 된다는 것인데, 오르페우스는 금기를 어기게 되며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영영 이별하게 되었다. 결국 혼자 지상으로 나온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음악을 듣고 찾아오는 다른 여자들의 구혼을 모두 거절하며 슬퍼하기만 하다가, 분노한 여성들에게 몰매를 맞고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만나기 위해 저승에 가는 오르페우스의 지극한 사랑 이야기는 오페라, 문학, 영화 등으로 변주되며 지속적으로 재창조되어 왔다. 뮤지컬 <하데스 타운>도 이 신화를 현대적으로 변용한 것이다.
뮤지컬 <하데스 타운>
뮤지컬 <하데스 타운>은 신화의 주인공과 기본 서사 구조를 가져왔으면서도 시대 배경이나 갈등 상황 등을 재설정함으로써 신화와 구별되는 새로운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작품 제목도 지하세계의 권력자 '하데스'를 전면에 내세워 <하데스 타운>이라고 했다. 시대 배경은 현대 산업사회이며, ‘하데스타운’을 광산 기업으로 설정했다. 그리고 하데스는 광산 기업을 운영하는 기업주로, 빈부격차가 심한 사회에서 노동자에게 임금을 주는 인물로 형상화 되었다.
하데스의 아내이자 지하세계의 여왕인 페르세포네는 여름을 맞아 지상에 머물며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한다. 다시 겨울이 찾아오자 하데스는 예정보다 일찍 아내를 데리러 오는데, 이로 인해 페르세포네는 지하인 하데스타운으로 돌아가야 하는 비참함을 노래한다.
오르페우스는 차갑고 메말라버린 지상세계에 다시 봄을 느끼게 해주는 곡을 쓰려고 노력하는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로, 허름한 술집에서 웨이터로도 일하는 청년으로 그려졌다.
에우리디케는 소극적인 행동 양태를 보인 신화에서와는 달리, 매우 가난하지만 스스로 사랑을 결정하는가 하면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지하 광산으로 일자리를 찾으러 떠날 정도로 철저한 현실 감각을 지닌 인물로 형상화 되었다.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하는데, 다시 봄이 찾아올 수 있도록 노래를 만들고 있다면서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에우리디케는 자신에게 청혼하는 오르페우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느냐”고 묻는 등 적극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는데, 이내 오르페우스와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페르세포네가 예정보다 빠르게 지하로 돌아가는 바람에 혹독한 긴 겨울이 돌아오고,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는 다시 궁핍하고 고단한 생활을 하게 된다. 에우리디케는 음식과 뗄감을 찾아 헤매고, 오르페우스에게 노래를 빨리 완성하라고 재촉한다.
에우리디케는 음악만 하는 오르페우스와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가난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광산을 찾아가며, 하데스는 그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광산 일을 시작한 에우리디케는 그곳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장벽을 건설한다. 그러나 그녀는 노동을 제공하고 보상을 받는 그곳에서의 삶에 점차 회의를 갖게 된다.
한편 뒤늦게 사랑하는 사람이 지하세계로 내려간 것을 알게 된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찾아 하데스타운으로 내려와 그녀에게 집으로 데려가겠노라고 약속하지만, 하데스가 나타나 에우리디케는 이미 계약서에 서명했으므로 그녀를 데려갈 수 없다고 한다.
이 때 오르페우스의 모습에 감동한 페르세포네가 하데스에게 에우리디케를 놓아주라고 말한다. 하데스가 본인을 감동시킬 노래를 부르라고 하자, 오르페우스는 하데스에게 페르세포네에 대한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를 부른다.
하데스는 결국 이들을 보내주기로 결심하는데,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신화에 나오는 "뒤를 돌아보면 안된다"는 금기가 그것이다. 마침내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그리고 하데스타운의 노동자들은 모두 함께 떠나기 시작하는데, 지상에 이르기 직전 오르페우스는 뒤를 돌아보게 됨으로써 에우리디케와 영원히 이별하게 된다.
신화에서와 마찬가지로 비극적 결말로 끝나는 것이다.
<하데스 타운>은 작품 처음부터 끝까지 '헤르메스'가 진행자 겸 해설자 역할을 수행했는데, 그 비중이 비교적 컸다. 그는 등장인물을 소개하는가 하면 극중 인물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약방의 감초 노릇을 했다.
<오르페우스>가 아닌, <하데스 타운>
이날 공연에서 오르페우스 역으로 박강현이 출연했다. 오르페우스는 아름다운 노래로 꽃을 피우는가 하면 봄을 오게 하고 하데스의 마음을 움직일 정도로 예술적 재능이 빼어난 음유시인이자 음악가이다. 그런데 박강현의 노래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가 고음으로 부른 몇몇 넘버곡은 아름답다기 보다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자아냈다.
'하데스'는 지현준이 열연했는데, 전반부에서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후반부에 이르러 묵직하고 웅장한 저음과 카리스마 넘치는 동작으로 무대를 압도하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신화에서 어둠의 세계인 지하를 관장하는 신 '하데스'는 밝고 순수한 '오르페우스'와 대비되는 인물이지만, 뮤지컬에서 그는 부정적이지만은 않은 매력을 선보였다.
광산 기업을 경영하는 하데스는 자본주의사회에 있어서 가진 자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노동자들 위에 군림하지만, 가난으로부터 자유를 지키겠노라며 자신의 왕국 주변에 높은 담을 쌓으며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겨울을 상징하는 하데스는 탐욕스러운 자본가의 면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오르페우스의 노래를 듣고 부인 페르세포네와의 사랑을 떠올리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이 또한 신화에 기반한 것이지만...
<하데스 타운>이 담고 있는 메시지
<오르페우스>는 '사랑과 죽음'에 관한 오래된 신화이다. 여타의 신화적 영웅들과 달리, 음악을 좋아하는 오르페우스는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며 죽음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녀를 찾아 저승 세계로 향한다. 지상에서 일상의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필부필부의 소망인데, 저승 세계를 향하는 오르페우스는 죽음마저 마다하지 않았을 때 사랑을 만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뒤를 돌아 보지 말라"는 금기를 어김으로써,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헤어질 수밖에 없는 비극적 결말로 끝나지만 말이다.
"뒤를 돌아 보지 말라"는 금기는 <오르페우스> 뿐만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나 한국의 <장자못 전설> 등에 등장하는 보편적인 모티프이다. 신화나 전설에서 이러한 금기는 신의 영역에 속하는 계율이다. 그런데 인간은 불완전한 속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금기를 어기고 말며, 이러한 인간적 약점은 결국 비극적 결말로 귀결된다.
신화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데스 타운>에서도 '사랑의 문제'가 매우 중요하게 제기되고 있다. 다만 신화에서는 인간의 존재론적인 측면이 부각되었다면, 뮤지컬에서는 사회적 의미가 부각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즉 <하데스 타운>은 가난과 추위 등 경제적 측면과 사랑의 문제가 매우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경제 관념이 투철하고 냉정하게 현실을 인식하고 있는 에우리디케와 경제 관념이 희박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오르페우스가 겪는 갈등 상황이 그러한 연관성을 잘 말해준다.
뮤지컬 <하데스 타운>에서도 '금기'와 '금기의 위반'은 매우 중요한 의미망을 형성하고 있다. 신화에서 오르페우스가 보여준 '금기의 위반'이 인간적 결핍 혹은 약점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하데스 타운>에서는 신뢰가 사라지고 불신이 난무하는 현대사회의 비인간적 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정도의 문제일 뿐, 예나 지금이나 가장 무서운 동물은 인간이다. 권력이 있으면 군림하려 들고, 옳고 그름보다는 철저히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고 결정하는 부류가 대부분인 현실...
옛말에,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고 했던가. 열 가지를 잘 해주어도 한 가지 서운한 것만 기억하는 간사함, 등에 칼을 꽂으며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악함....
그렇다 해도 겨자씨 만한 믿음도 없는, 인간이 인간을 믿지 못하는 세상은 불행하다. 아무리 각박하고 팍팍한 세상이지만, 인간에 대한 신뢰의 끈을 놓지 않을 때 우리는 살아가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재즈풍의 넘버 곡들은 음악성이 뛰어나 보는 내내 즐거움을 더했다. 트롬본, 첼로, 바이올린, 드럼, 더블베이스, 기타, 피아노·아코디언으로 이루어진 7인조 라이브 밴드가 무대 위에 노출돼 있어 콘서트 같은 생동감을 자아냈다.
<하데스 타운> Numbers
1막
2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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