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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레터>, 구원의 뮤즈는 어디에

뮤지컬

by 간다르바 2021. 12. 25.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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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4일 코엑스 아티움에서 뮤지컬 <팬레터>를 관람했다. 코엑스에 여러차례 갔지만, 아티움 공연장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이 작품은  2016년에 초연되었으며, 올해가 네번째 다시 무대에 올리는 것이다. 여느 뮤지컬과 달리 춤의 비중은 크지 않은데, 대사가 묘미 있고 스토리에 부합하는 넘버 곡 완성도가 높아서 좋았다.    
 
 
<팬레터>는 일제강점기 문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그린 뮤지컬이다. “나라는 정복당했지만 예술은 정복당할 수 없다”면서, 계급주의 문학을 반대하고 순문학을 지향했던 칠인회(‘구인회’라는 문학 단체가 있었는데, 이를 변용한 걸로 보임) 멤버들이 주인공이다. 허구의 여성 인물 히카루를 제외하면, 그들은 모두 남자들이다. 여섯 명의 남자 배우들이 양복을 입고 때에 따라서는 중절모를 쓰고 있다. 이상이 운영했던 다방 <제비>나 박인환이 즐겨 다녔던 명동의 은성다방(최불암 엄마가 운영한) 등 아지트에서 작가들은 문학을 논하고 연애를 탐하고 시대를 아파했는데, 남자 배우들의 외양에서 모던보이 이미지가 느껴졌다.
 

 


오늘날에는 대부분 미국이나 유럽으로 유학 가지만, 당시엔 일본으로 유학가는 게 대세였다. 최초의 극작가 김우진과 영원한 청년시인 윤동주를 비롯해서, 이 작품의 바탕이 된 구인회 멤버 이상, 김유정 등 대부분의 지식인 문인들은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교토 동지사대에 있는 윤동주 시비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던 기억이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김해진, 이윤, 정세훈, 히카루 등이다. 김해진은 소설가 김유정을 모델로 한 인물인데, 연희전문(연세대)을 다니던 김유정은 판소리 명창 박록주를 짝사랑한 일로도 유명하다. 박록주 명창이 쓴 자전적 글을 보면, 김유정의 집착은 대단해서 스토커처럼 박록주를 따라 다녔다. 박록주가 “나는 당신같은 사람이 좋아할만한 여자가 아니다. 공부나 열심히 하라”며 끝까지 냉담하게 거절하자, 결국 김유정은 낙담하면서 단념했다. 얼마 후 김유정이 요절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박록주는 “손이라도 한번 잡아줄걸 그랬다”고 하면서 안타까워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히카루가 김유정이 실제 사랑했던 여인을 모델로 한 인물이라면, 박록주와 관련이 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방적인 러브스토리를 변용하여 새로운 스토리로 구축한 것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이윤은 이상을 모델로 한 인물인데, 폐결핵을 앓고 일본 감옥에 갇히는 불운을 겪기도 한다. 실제로 이상은 폐결핵을 앓았고, 일본에서 불령선인으로 의심받아 고초를 겪기도 했다.

정세훈은 김해진을 선망하는 열성팬으로, 작가 지망생이다. 그는 히카루라는 가상 인물 행세를 하며 김해진과 팬레터를 주고 받는데, 팬레터가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전개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이 뮤지컬의 핵심이다.

이야기는 정세훈이 일본 감옥에 갇혀 있는 이윤을 면회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정세훈이 히카루라는 가상의 인물로 쓴 팬레터와 소설 작품이 있는데, 소설 작품이 출단된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막기 위해 이윤을 설득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면서 히카루에 관한 진실을 털어놓는다.

‘문학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을 던지면서 독자와의 교감에서 행복을 느끼는 작가 김해진은 자신을 진짜 좋아한다는 히카루의 팬레터를 받고 금방 사랑에 빠진다. 히카루의 팬레터는 김해진을 살아 있게 만드는 힘이자 창작의 동력이었던 것이다.

정세훈의 고민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김해진과 만나기로 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김해진이 저렇게 좋아하는데 진실을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정세훈의 고민은 계속된다. 김해진 또한 히카루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면서 행여 팬레터가 오지 않는 날이면 실의에 빠진다.
비록 그것이 환타지라 하더라도, 당사자에게 큰 행복이라면 그대로 두어야 하는가 아니면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을 알려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어느 경우든 진실을 마주한다는 건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렇지만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듯이, 환타지가 행복일 수도 있다. 이 작품이 담고 있는 본질적인 주제의식을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도 볼만했다. 남성배우들이 채워나간 무대의 무게감, 특히 백형훈(김해진 역)의 군더더기 없이 맑고 조용한 카리스마가 배어있는 목소리가 매력적이었다. 가상의 인물 히카루의 환타지를 그림자로 춤으로 열정적인 대사와 노래로 표현한 소정화는 자칫 단조롭고 지루할 수도 있는 작품에 활력과 생명을 불어넣어주었다.

뮤지컬 넘버곡도 스토리 전개와 부합하면서 상황에 따라 격조 있게 혹은 격정적으로 극의 분위기를 잘 드러내 주었다. 반주도 화려하지 않으면서 단출하고 깔끔하게 노래를 뒷받침했다.
 

누군가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녕 행복한 일이다. 손편지와 공중전화로 소식을 주고받던 시대에는 안타까움과 설렘이 교차하는 ‘기다림의 미학’이 있었다. 지금은 소통의 수단이 넘쳐난다. 핸드폰에 세상이 담겨 있고, 그 안에는 카톡, 밴드, 메일 등이 있어서 언제든지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열려 있다. 그럼에도 이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와 외로움은 더 커져만 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마침 24일은 인류를 기원하기 위해 그 분이 말 구유에서 태어나신 날 전야로,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뮤즈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극장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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