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4일 피터한트케 작 <관객모독>(기국서 연출)을 관람했다.
연극에는 필연적으로 인물이 등장하고 인물들간 갈등과 사건이 벌어진다고 생각하는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서양의 경우, 아리스토텔레스가 연극에서의 리얼리티와 극적 환상을 중시한 이래 이른바 "제4의 벽" 이론이 오랫동안 하나의 극적 전통으로 자리잡아왔다.
무대와 객석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어서, 관객은 단지 지켜볼뿐 무대 위의 일에 일체 관여하지 않으며 배우들은 아무도 보지않는다는 전제하에 각자의 배역에 충실하면 되었다.
"연극은 이런 것"이라는 오랜 관행에 문제를 제기하며 실험적인 표현 수법을 선보인 사례는 적지 않은데, 브레히트의 서사극이론이 대표적인 예이다. 브레히트는 극장이 현실을 변혁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연극을 통해 관객을 계몽하고 현실인식을 제고하고자 했다. 그래서 다양한 극적 표현 기법을 활용하여, 관객들에게 "연극은 연극일 뿐"임을 각인시키며 극적 환상을 깨뜨리고 현실 인식을 높일 수 있는 서사극 이론을 정립한 것이다.
피터한트케의 <관객모독>도 연극에 관한 관행적인 통념을 정면으로 문제 삼은 작품이다. 무대에 등장한 4명의 배우는 연극은 무엇이며 관객은 어떤 존재인가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는데, 이 점이 이 작품의 주제이기도 하다. 배우들은 이 작품엔 플롯을 지닌 어떤 사건도 등장하지 않는다며 공공연하게 말했다. 언어연극임을 밝힌 배우들은 틈날때마다 관객들에게 말을 건네며 무대에 끌어들였다. 연극의 주체는 배우가 아니라 관객이라면서... 그러나 자신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관객의 수준이 낮아 더 이상 공연을 할 수 없다고 함으로써, 작품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며 본격화되었다. 무대감독이 등장하며 배우들과 논쟁아닌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감독은 관객이 이해할 수 있는 공연을 해야 한다며 배우들에게 여러가지 주문을 했다. 감독의 요청에 따라 배우들은 극중극 형식의 공연을 보여주는데, 극적 동작과 대사는 분리되어 있어 연극이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했다.
관객중 한명을 무대 위에 오르게 해서 맥락에 맞는 연기를 주문하기도 했는데, 관객이 배우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어색한 몸짓만 보이다 내려온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때부터 작품 제목에 걸맞게 관객 모독이 시작되었다. 배우들은 때론 상소리를 하고 다양한 이유를 들어가며 관객들을 모독했다.
그러나 사실 관객만 문제인가. 배우는 떳떳하고 모욕당할 점은 없는가. 관객의 심금을 울릴 만큼 혼이 담긴 연기를 하지 못하고, 역량이 부족한 배우들 또한 많지 않은가. 그러므로 관객모독은 배우 모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래전 이 작품을 본적 있는데, 그 당시 관객들은 일방적으로 모독당하고 배우들에게 아무런 말도 못한 기억이 있다. 관객을 소독한다며 배우들이 뿌리는 물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그런데 이번 공연은 달랐다. 배우들이 자신들을 모독해달라고 적극 요구하는가하면, 감독역을 맡은 배우는 자신들에게 물을 뿌려달라며 물통을 관객에게 건네기도 했다. 그리고 관객들도 적극적으로 배우들을 모욕하는데 동참했다.
일반적으로 근본적인 문제,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는건 골치 아프고 재미가 없다. 공연도 마찬가지다. 인물이 등장하고 사건이 있고 정교한 플롯과 숙련된 배우의 연기가 있으면 됐지, 새삼 연극은 무엇이고 관객은 어떠해야하는가를 제기하는 언어연극이 재미있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다시 보는 <관객모독>은 즉흥성과 동시대성을 살리면서(이 또한 잘짜여진 연출의 산물이겠지만) 곳곳에 웃음코드를 심어놓아, 제법 흥미있게 보았다. 배우들의 숙련된 연기도 재미를 더하는데 일조했다.
연극 <가면산장 살인사건>, 진실 찾기와 인간의 욕망 (0) | 2022.10.24 |
---|---|
연극 <세인트 조앤> (2) | 2022.10.11 |
피터한트케 작 <관객 모독> : 객석과 무대의 소통을 문제삼다 (0) | 2022.08.06 |
<건달은 개뿔> 을 보다 (0) | 2022.07.21 |
<리차드 3세>, 일그러진 욕망의 끝 (0) | 2022.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