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가>는 판소리 전승 5가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색채가 강한 작품이다. 심청이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열다섯의 어린 몸으로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일련의 과정에 담겨 있는 슬픔의 깊이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근대 5명창에 속하는 송만갑 명창은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마음의 상처가 덧날까 염려하여 <심청가>를 부르지 않았다는 일화도 전한다.
<심청가>는 심청이 인당수 빠지는 장면을 기준으로 하여,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기까지의 과정이 전반부에 해당하다면, 심봉사가 황성에 올라가 맹인잔치에 참석하여 눈 뜨는 데 까지가 후반부에 해당한다. 전반부는 대부분 강렬한 비장미를 자아내는 소리 대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후반부에 와서야 어느 정도의 골계미가 표출되어 나타는데, 심봉사의 성격 변화와 더불어 뺑덕어미의 존재가 그러한 골계미의 창출에 크게 기여하기 때문이다.
<심청가>에는 주인공과 맞서는 뚜렷한 악인형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나마 후반부에 등장하는 뺑덕어미가 이에 가까운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하면, 뺑덕어미는 악인형 인물이라기 보다는 자기 욕망에 충실한 일탈형 인물 혹은 세속적 인물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뺑덕어미는 초기 <심청가>에는 보이지 않으며, 후대에 삽입된 인물이다. 서사의 맥락을 고려할 때, 뺑덕어미가 빠진다고 해서 이야기 전개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뺑덕어미는 삽화적 인물에 해당한다.
뺑덕어미는 <심청가>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조선 후기에 향유되었던 가사 작품 <초당문답가>라는 책이 있다. 여기에는 윤리 의식이 결여된 반규범적인 인물이 다수 등장하는데, 이들 인물들의 행동 양태를 비판하며 올바른 길로 갈 것을 권유하는 교훈을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주제 의식이다. 그런데 뺑덕어미는 <초당문답가> 중 ‘용부편(慵婦篇)’에 등장하는데, 여기에 묘사된 뺑덕어미의 행동 양태는 이러하다.
남대문밖 뺑덕어미 제 천성이 저러한가. 배워서 그러한가. 본 데 없이 자랐구나. 여기 저기 무릎마춤 싸움질로 세월이요, 나가면은 말전주요, 들면은 음식 공론, 제 조상은 젖혀 놓고 불공하기 위업이요, 무당 소경 고혹하여 의복가지 다 내 가고, 남편 모양 볼짝시면 삽살개의 뒷다리라. 자식 거동 볼짝시면 털 벗은 솔개미라. 엿장수와 떡장수는 아기 핑계 거르지 않고 물레 앞 씨아 앞은 선하품에 기지개라. 이야기책이 소일이요, 음담패설 세월이라. 이 집 저 집 이간질로 모함잡고 똥 먹이며, 인물초인 떨어내어 패쪽박이 되었구나.세간이 짧아가고 걱정은 늘어가며 치마는 짧아가고 허리통이 길어간다.
전통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가정을 제대로 이끌어 가는 것이었는데, 조선 후기에 오면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대접하는 일)’과 더불어 특히 ‘치산(治産)’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데 <초당문답가>에 나오는 뺑덕어미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반하는 부정적인 행실만 일삼고 있다. 조상을 받드는 대신 불공이나 굿 하는 데 관심이 많으며, 가사(家事)를 소홀히 하여 남편과 자식들의 행색은 남루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치산에 힘쓰는 대신, 소설 읽기를 즐기며 가산을 탕진한다. 이러한 뺑덕어미의 행실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으로, 뭇 여성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인물의 전형이라 할만하다.
<심청가>에 등장하는 뺑덕어미는 <초당문답가>의 그 뺑덕어미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심봉사가 딸 심청을 잃고 비탄에 잠겨 있을 때 뺑덕어미가 나타난다. 뺑덕어미가 앞 못보는 심봉사에게 접근한 이유는 순전히 그의 재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뺑덕어미의 등장을 소개하는 아니리는, “본촌(本村)에 묘(妙)한 여인(女人)네가 하나 사는데, 호(號)가 뺑파것다. 심봉사가 딸 덕분에, 전곡간(錢穀間)이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웃사람 알지 못하게, 자원(自願) 출가(出家)하였것다. 이 여인네가 어떻게, 입주전부리가 궂던지, 말로다 할 수 없던 가부더라. 거 불쌍한 심봉사 가산(家産)을, 꼭 먹성질로만 탕진(蕩盡)을 하는데, 행실(行實)이 꼭 이러것다.”라고 되어 있으며, 이어서 그의 성정(性情)을 묘사하는 소리 대목이 나온다.
(자진모리) 밥 잘 먹고, 술 잘 먹고, 떡 잘 먹고, 고기 잘 먹고, 양식 주고 술 사먹고, 쌀 퍼주고, 고기 사먹고, 이웃집에 밥 붙치기, 통인 잡고 욕잘하고, 초군들과 싸움하기, 잠자며 이 갈기와, 배 긁고 발목 떨고, 한밤중 울음 울고, 오고 가는 행인 드려, 담배 달라 신란하기, 힐끗 하면 핼끗하고, 핼끗 하면 힐끗 하고 뺏죽하면 삣죽하고, 뺏죽하면 삣죽하고, 술 잘 먹고, 정자 밑에 낮잠 자기, 남의 혼인 헐량으로, 단단히 믿었는데, 해담을 잘 하기와 신랑 신부 잠자는 데, 가만 가만 가만, 문 앞에 들어서며, 봉창에 입을 대고, 불이야.
사실적 표현과 해학적 표현 그리고 과장적 표현이 어우러져 뺑덕어미의 성정이 다양하게 묘사되고 있는데, 이러한 사설의 짜임은 <흥보가>에 나오는 ‘놀보 심술타령’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사실 뺑덕어미와 놀보는 여러 면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인물형이다. 무엇보다도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며, 집단의 가치 혹은 윤리 보다는 개인의 욕망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렇지만 두 인물이 보여주는 욕망의 표출 양태나 성격 그리고 지향점은 다르다. 놀보는 인색하면서도 부의 축적에 관심을 갖는 반면에, 뺑덕어미는 본능에 충실하면서 자기 욕망의 실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위에 제시한 사설은 뺑덕어미가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욕망이라 할 수 있는 식욕과 성욕에 충실한 인물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뺑덕어미가 심술 궂은 성정의 소유자일 뿐만 아니라 자기 욕망에 충실한 세속적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심봉사가 그녀를 받아들인 이유는 단순히 앞을 볼 수 없는 처지에서 사람의 됨됨이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어쩌면 돌 볼 사람 하나 없이 외로움에 사무쳐 홀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심봉사가 뺑덕어미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심봉사는 나무칼로 귀를 싹 베어가도 모르게 될 정도로 뺑덕어미에게 빠져들었건만, 자기 욕망에 충실한 뺑덕어미는 심봉사의 가산을 서서히 탕진해 가기 시작한다. 심봉사가 돈궤에 엽전이 없어 뺑덕어미에게 어찌된 까닭이냐고 묻자, 뺑덕어미는 “아이고, 영감도 저러기에 외정(外丁)은, 살림 속을 몰라. 아 영감 드린다고 술 사오고, 고기 사오고, 떡 사오고, 담배 사오고, 이리저리 쓴 돈이, 그 돈이 그 돈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돈이요.”라고 하면서, 오히려 심봉사에게 면박을 준다. 뺑덕어미의 이러한 행실은 심봉사의 본처 곽씨부인과 완벽하게 대조를 이루는 모습이다. 곽씨부인은 현철하고 모르는 것이 없으며, 싻바느질 등 품을 팔아 앞 못보는 가장을 봉양하는 규범적인 여성의 전형이다.
뺑덕어미는 가산을 탕진할 뿐만 아니라 젊은 황봉사와 정분이 나서 마음껏 놀아나며 자신의 성적(性的) 욕망을 펼쳐 보인다. 심봉사가 황성에서 열리는 맹인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뺑덕어미에게 같이 갈 것을 권하자, 뺑덕어미는 관가에서 지급한 여비마저 갈취할 목적으로 동행할 것을 약속한다. “영감 여필종부(女必從夫)라니, 천리(千里)라도 만리(萬里)라도, 영감 따라 가제. 어느 놈 따라갈 놈 있소.”라며 따라 나서는 뺑덕어미에게 심봉사는 “아닌 것이 아니라, 우리 뺑파 같은 사람 없더라. 열녀(烈女)다 열녀(烈女)여, 암 백녀(百女)지.”라고 응대하며, 함께 황성길에 오른다. 그러나 뺑덕어미는 도중에 젊은 황봉사와 야반도주함으로써, 심봉사를 더욱 곤궁한 처지로 밀어넣는다.
흥미로운 사실은, 뺑덕어미의 행실이 이처럼 고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징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심봉사가 눈을 뜬 후 만좌맹인이 모두 눈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뺑덕어미를 유인한 죄로 황봉사만은 바로 눈을 뜨지 못하다가 결국 한쪽 눈만 뜨게 되었다는 상황만 설정되어 있을 뿐이다. 이와 관련된 대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아니리) 이렇게 춤으로 황극전이, 춤바다가 되었는데, 그 중에, 눈 못 뜬 봉사 하나 우두머니 서서, 울고 섰거늘, 심황후 분부하시되, “지어비금주수(至於飛禽走獸)까지도 눈을 떴는데, 어찌하여 저 봉사는, 눈을 못 뜨는고?” 그때여 황봉사는 뺑덕이네 유인한 죄로, 눈을 못 뜨고, 그 자리에 엎드러지며,
(중머리) “예, 죄상을 아뢰리다. 예, 죄상을 아뢰리다.심부원군 행차시에, 뺑덕이란 여인을 앞세우고 오시다가, 주막에 들어 잠잘 적에, 그 여인 유인하여, 밤중 도망을 하였는데, 그날 밤 오경시(五更時)에, 심부원군 우시는 소리 구천에 사무쳐서, 명천이 아신 바라. 여태 눈을 못 떴으니, 이런 천하 못 쓸 놈을, 살려두어 쓸 데 있소. 당장 목숨을 끊어주오.”
(아니리) 심황후 이 말을 들으시고, “인수(引水) 무갈(無渴)이요, 개칙위선(改則爲善)이라. 네가 네 죄를 아는 고로, 시이(是以) 살리노라. 어서 눈을 뜨라.” 어명하여 노니, 황봉사가 그제야 눈을 뜨는데, 마치 총 놓기 좋을 만하게, 한 눈만 떴구나. 이런 일을 보드라도, 적선지가(積善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이요. 적악지가(積惡之家)에 필유여악(必有餘惡)이라. 어찌, 천도(天道)가 없으리오.(강산제 <심청가> 중에서)
<심청가> 전체를 놓고 보면, 뺑덕어미가 차지하는 양적 비중이 그렇게 크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녀는 작품의 후반부에 잠시 등장하는 삽화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뺑덕어미의 작중 역할이나 비중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자칫 비장 일변도로 흐를 수도 있는 상황에서, 뺑덕어미는 철저하게 세속적 욕망에 충실한 행동 양태를 보이며 해학적 웃음을 유발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심봉사를 절망의 낭떠러지로 몰아간 그녀의 반가족적․반윤리적 행위가, 결과적으로 심봉사의 개안(開眼)의 의미를 극대화하는 데 기여한 측면도 그녀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다.
윤리적인 면에서 뺑덕어미는 비난 받아 마땅하지만, 공연예술의 측면에서 뺑덕어미는 청중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는 매력을 적지 않게 지니고 있다. 외모가 출중하지는 않지만 온갖 애교와 감언이설로 심봉사의 마음을 사로잡는 팜므 파탈적 모습, 과장과 해학이 어우러진 일탈된 세속적 욕망의 표출 장면 등에서 청중들은 웃음과 오락적 즐거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판소리 <심청가>에서 뺑덕어미가 등장하는 부분은, “심봉사와 결연 - 가산 탕진 - 황봉사와의 일탈된 사랑 - 심봉사와 황성 올라가는 대목 - 황봉사와 야반 도주 - 황봉사, 한쪽 눈만 뜨는 대목”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 구조는 그 자체만으로도 독립적인 작품으로 전환될 수 있는 극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뺑덕어미를 주인공으로 삼은 마당놀이나 창극 작품이 그동안 꾸준히 공연되어 왔는데, 뺑덕어미의 호인 '뺑파'를 내세운 <뺑파전>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뺑파전>은 앞에서 제시한 이야기 구조를 바탕으로 하면서, 황봉사에 해당하는 황칠이를 뺑파의 상대역으로 부각시켜 일정하게 시대상을 반영하면서 해학적인 웃음을 유발하는 데 목적을 두고 구성된 작품이다.
<뺑파전>은 김일구 명창이 국립극장 단원으로 재직할 당시 허규 선생의 제안으로 공간사랑․세실극장 등에서 공연하여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김일구, 김영자 부부 명창 주연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 외에도 뺑파 역을 맡은 배우는 대개 해학적인 몸짓과 극적 표현에 능한 소리꾼이 담당해 왔다. 전주에서 활동했던 이순단 명창 그리고 국립창극단 단원인 김금미 명창과 서정금 명창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며, 탤런트 전원주도 마당놀이 <뺑파전>에서 뺑파 역을 담당한 바 있다.
뺑덕어미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려 주는 이야기는 없다. 그녀는 홀로 된 여성으로, 윤리의식이나 사회 규범과는 거리가 먼, 일탈적 욕망에 충실하며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철저하게 세속적인 인간형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형상에는 인간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일탈된 욕망의 리얼리티가 투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결코 긍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미워할 수도 없는, 일그러진 피에로의 비애와 웃음이 중첩된 인물이 바로 뺑덕어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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