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3일 대학로에 있는 홍익대 아트센터에서 테네시 윌리엄스 작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관람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원제가 "A streetcar of Desire"로, 실제 미국 남부에서 운행하는 열차 이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작품에서는 주제의식을 함축한 은유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욕망은 세속적이며, 윤리와 대립적이다. 윤리가 질서와 안정을 뜻한다면, 욕망은 원초적이고 역동적이다. 욕망은 세속에서 인간을 살아 있게 하는 힘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때론 제어해야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지나치게 욕망에 집착하면 파멸에 이르기 쉽기 때문이다. 주인공 블랑쉬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탈된 성적 욕망에 사로 잡혀 파멸해 가는 삶을 실감나게 드러내고 있다. 이날 공연에서 박해미는 블랑쉬의 캐릭터를 잘 포착해서 보여주었다.
이 연극은 미국 남부의 한 도시를 배경으로 보편적인 인간군상들의 갈등과 삶을 다룬 작품으로, 그 중심에는 몰락한 남부 귀족출신 대지주의 딸 블랑쉬가 있다.
블랑쉬는 자신의 전 재산인 남부 벨레브의 농장을 잃어버리고, 동성애자인 남편마저 그녀가 보는 앞에서 자살하는 불운을 겪었다. 이로 인한 충격으로 트라우마를 안고 생활하던 블랑쉬는 남학생과의 스캔들로 직장을 잃게 되며, 자포자기한 채 성적으로 방종하고 타락한 삶을 영위한다. 이런 와중에 블랑쉬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무덤'선으로 갈아탄 후 '극락'역에서 내려 미국 남부 도시 뉴올리언즈의 한 작은 집에 살고 있는 여동생 스텔라의 집을 찾아간다. 스텔라는 언니와 달리 일찌감치 독립하여 이곳에 정착하여 살아가고 있었다.
블랑쉬가 여동생의 집에 묵게 되면서 묵게 되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과거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현실감각이 결여된 블랑쉬는 폴란드 출신의 노동자로 거친 성정을 지니고 있는 스텐리(스텔라의 남편)와 긴장관계 나아가 갈등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블랑쉬는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교직에 있다가 휴가차 왔다고 말하며 귀부인처럼 행동한다. 그녀는 흰색 커튼으로 집안을 장식하며, 틈만 나면 샤워를 하며 와인을 즐긴다. 그녀가 흰색을 좋아하고 샤워를 자주 하는 모습은 과거의 상처를 씻어내고자 하는 일종의 의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주름살이 드러나지 않도록 밝음보다 어둠을 좋아한다든가 와인을 즐기는 모습은, 애서 현실을 외면하고 환상에 빠져 위안을 얻으려는 그녀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이다. 블랑쉬가 환상 속에 빠져 있다는 사실은, 그녀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한 남성과 사랑스럽게 만나는 몽환적인 장면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스텐리는 요즘 시각에서 보자면 마초 기질이 다분한 인물인데, 임신한 부인 스텔라를 폭행하는 야만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인종적 신분적 컴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한 스텐리는 다민족 국가인 미국에서 완전한 미국인으로 정착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며, 대지주의 딸이자 허영끼가 다분한 블랑쉬를 못마땅해하고 경멸하기까지 한다.
블랑쉬의 여동생 스텔라는 남편으로 부터 폭력을 당하면서도 성적으로나 생활면에서 만족해 하며 일상을 유지한다. 블랑쉬가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 남편 스텐리를 비난하자, 스텔라는 "남녀 사이에는 다른 모든 걸 덜 중요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그 무언가가 있다"고 하며 스텐리를 옹호한다. 이에 대해 블랑쉬는 '야만적인 욕망'이라며 재차 반박하는데, 이런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자매의 세계관과 삶의 태도는 확연히 구별된다.
블랑쉬는 동생 부부와 주변 인물들의 거칠고 때론 동물적이기조차 한 모습에 당혹스러워 하며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하는데, 언제나 남성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려는 의존적인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스텐리의 친구 '미치'의 구애를 받아들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렇지만 미치는 블랑쉬의 문란한 과거를 알고 그녀에게 분노를 표출하는데, 블랑쉬는 자신이 여러 남자와 성애에 빠지게 된 것에 대해 '낯선 남자들과 사랑을 맺는 것만이 자신의 공허함을 메울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블랑쉬에게 남성의 친절이 진실인지 아니면 성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감언이설인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설령 그것이 환상이라 하더라도 자신에게 위안과 위로가 된다는 점이 중요할 뿐이었다.
결말에 이르러 블랑쉬는 스텐리에게 강간당하고 미치에게마저 버림받는 신세가 되며, 정신병원으로 끌려가는 것으로 극이 마무리된다. 낯선 의사의 팔에 이끌려 나가면서 블랑쉬는 '자신은 언제나 낯선 사람들의 친절에 의지해 왔다'고 말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21세기 '지금 이곳'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1947년 뉴욕의 배리모어 극장에서 엘리아 카잔의 연출로 초연되었으며, 한국에서는 1955년 극단 '신협'이 무대에 올렸다. 미국 남부 문화에 기반하면서, 동성애, 강간(근친상간)을 다루고 있는 이 연극은 한국적 정서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사실주의 연극의 전범을 보여주는 고전으로 평가받으며 꾸준히 공연되고 있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탈된 성적 욕망으로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블랑쉬와 마초적인 남편에 순응하며 현실에 만족해하는 동생 스텔라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삶의 주체로 나서지 못하고 의존적인 여성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 왜곡된 성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성을 성적 욕망 충족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남성이 있다면 비판 받아 마땅하며, 성을 무기 삼아 남성에 의존하여 세속적 욕망을 성취하려는 여성 또한 그러한 삶의 태도에 대해 반성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환상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게 해주는 일시적 처방은 될수 있을 것이다. 타인에 기대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일도 어느 정도 가능할수 있다. 그렇다 해도 현실을 외면하고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면 진정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하기 어렵다.
블랑쉬가 불운한 삶을 살게 된 데는 백인 남성 중심의 미국 남부 사회라는 시대적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블랑쉬를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 볼 여지가 없지 않은 까닭이다. 이제 시대는 엄청나게 변했다. 시대정신을 호흡하며,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일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일... 이는 남성이나 여성이나 모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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