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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손 프로젝트의 '단편선 레파토리展' <황금풍경>, <그립은 흘긴 눈>, <29호 침대>, <직소> 후기

연극

by 간다르바 2021. 10. 10.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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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8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양손프로젝트의 '단편선 레파토리展' 첫번째 공연 <황금풍경>(다자이 오사무 작), <그립은 흘긴 눈>(현진건 작), <29호 침대>(모파상 작), <직소>(다자이 오사무 작)를 관람했다.

자유소극장은 규모가 작은 편인데, 맨 앞줄에 앉다보니 무대가 코앞이다. 극장에 들어서자 극적 장치 하나 없이 텅 빈 무대만이 덩그랗게 있었다. '양손 프로젝트'의 공연을 여러 번 보아왔던 터라, 익숙한 풍경이었다.

이들의 공연을 볼 때마다, 연극에서 '배우'는 어떤 존재이고 어떤 존재여야만 하는가를 새삼 되새겨 보곤 한다. 배우(優)익살로 웃음을 불러일으킨다는 의미의 '배(俳)'와 우수(憂愁)를 원뜻으로 하는 글자이자 비극을 뜻하는 '우(優)'로 이루어진 말이다. 한마디로 배우는 인간을 울리고 웃기는 존재인 것이다. 배우는 자신의 몸이 곧 표현 수단으로, 작중 인물을 살아 숨쉬게 하는 독특한 존재이다.

세 명의 배우로 구성된 '양손 프로젝트'는 무대 장치나 조명 그리고 효과음 등을 최소한으로 사용하면서, 오로지 배우 자신의 역량을 극대화 하여 무대를 채워 나간다. 이날 공연도 그랬다. <황금풍경>(다자이 오사무 작)은 손상규, <그립은 흘긴 눈>(현진건 작)은 양조아, <29호 침대>(모파상 작)는 양종욱이 모노드라마 형태로 보여주었으며, 마지막 작품 <직소>(다자이 오사무 작)에서는 세 명의 배우가 열연했다.

단출한 무대


네 작품 모두 원작이 있는 소설을 연극화 한 것이다. 그런데 '소설 문법'을 '연극 문법'으로 수용하며, 배우는 이야기 전달자 역할과 작중 인물의 역을 감칠맛나게 감당했다. 작품의 제목과 작가 그리고 출간연도를 소개하며 공연을 시작하고, 소설 지문을 그대로 연극 대사로 활용했다. 또한 배우들은 소설 독자들의 몫인 '상상의 영역'을 각기 지니고 있는 개성적인 표정과 몸짓으로 연극화 함으로써, 해당 작품의 의미와 주제의식을 관객의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시켰다.

우연의 일치인지 혹은 연출 의도가 개입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날 무대에 올린 4작품은 모두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세속적인 욕망(비루함, 추악함, 야비함, 사악함 등등)을 지닌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다자이 오사무 작 <황금풍경>은 타인의 행복을 온전히 축하하지 못하는 복잡미묘하고 굴절된 인간의 내면 의식을 포착하여 보여준 작품이다. 사람 좋은 '오케이'를 자신의 부하(家来:けらい)처럼 다루었던 유년기의 '도련님'이 청년이 되어서 소설가의 꿈을 가지나, 고생하며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오케이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되는데, 주인공은 이를 기뻐하지 못하며, 방문하고 싶어하는 오케이의 요청을 거절하고 예전처럼 심술궂게 대해 버린다는 이야기이다.

현진건 작 <그립은 흘긴 눈>은 채선이라는 기생이 열아홉의 나이에 살림을 차렸던 한 남자를 추억하며 들려주는 이야기로, 근대의 낭만적 사랑의 허위를 묘미 있게 드러낸 작품이다. 사랑을 나누던 남자가 막상 함께 죽자고 하자 채선은 애정과 인간의 본원적 욕망 사이에서 고민하며 갈등한다. 진정성과 위선, 현실적 욕망과 진실한 사랑 사이에서 내적 갈등을 겪는 것인데, 이러한 채선의 심리를 실감나게 연기한 배우 양조아의 연기가 압권이다.

모파상 작 <29호 침대>는 딜레마 상황을 통해 진정한 사랑은 무엇일까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 작품이다. 주인공 ‘에피앙 대위’는 프랑스 군인으로 스스로 미남이라고 말한다. 에피앙 대위는 '이르마'라는 여성과 사랑하게 되는데, 대위가 참전한 사이 그녀는 독일군들에게 강간을 당하고 매독에 걸린다. 그런데 그녀는 더 많은 독일군들을 죽이기 위해 일부러 매독을 치료하지 않는다. 참전에서 돌아온 에피앙 대위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이르마를 면회하나, 주위 사람들의 조롱을 의식하고 이르마에게 더 이상 찾아 오지 않겠다고 한다. 이르마가 에피앙 대위에게 위선자라는 말과 함께 비난을 쏟아내자, 대위는 병실을 도망치듯 빠져나온다. 그리고 며칠 뒤 에피앙 대위는 이르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극은 끝난다. 사랑보다 타인의 시선을 더 의식하며 속물적인 비겁함을 보이는 에피앙 그리고 고통으로 죽어가며 진정한 사랑에 대해 절규하는 이르마....배우 양종욱은 의자 하나를 소품으로 활용하며, 두 인물의 캐릭터와 서사를 인상적으로 그려냈다.

다사이 오사무 작 <직소(直訴)>(<유다의 고백>으로 번역되기도 함)는 가롯 유다와 예수에 관한 이야기로, 세속적 욕망에 함몰된 인간의 추악함을 현실감 있게 그린 작품이다. 유다가 예수를 로마군에게 팔아넘기면서 예수에 대한 복합적 감정을 횡설수설하듯이 떠벌이는 내용이어서 제목을 <직소(直訴)>라고 했다.
장사꾼 유다는 예수와 나눈 대화를 회상하며 애증을 토로한다. 물질적 가치와 현세의 기쁨만을 소중히 여기는 유다는 예수가 아름다운 사람임은 인정하면서도, 그가 추구하는 고귀하고 이상적인 가치는 부정하며 때론 질투의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내적 갈등으로 고민하던 유다는 결국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면서도 현상금이 걸린 예수를 고발한다. 양종욱과 양조아 그리고 손상규 세 명의 배우가 유다 배역을 담당하며 그 복잡한 심리를 입체적으로 보여주었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도련님', '채선', '에피앙 대위' 그리고 '가롯 유다'는 모두 딜레마 상황에서 고민하거나 갈등하면서도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세속적 욕망에 충실한 인물들이다. 이에 비해, 상대역인 '오케이', '한 남자', '이르마' 그리고 '예수'는 '진정성'과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인물들이다.

인간의 내면에는 '또 다른 나'가 공존하고 있다. 그 모습은 양면적일 뿐만 아니라 때론 다면적이기조차 하다. 겉으로는 우아하지만 이면은 추악한 경우도 허다하다. 이 연극은 인간의 이러한 본질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배우의 표정과 몸놀림 하나하나를 거울 삼아, 나 자신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 다시 한번 성찰한다.


왼쪽부터 배우 손상규, 양조아, 양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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