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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자유글

by 무아(無我) 2026. 9. 1.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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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는 판사였다. 그의 직업이 지닌 의미는 간단치 않다. 그는 평생 법정에서 타인의 삶과 죽음을 서류와 절차로 판단하고 처리했다. 냉정하고 신중하며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는 것, 그것이 그가 자부심을 가졌던 직업적 미덕이었다.

그런데 병이 깊어지고 의사를 찾아갔을 때, 의사가 보인 모습은 놀랍도록 판사와 닮아 있다. 의사는 이반을 마치 그가 평생 법정에서 피고인을 대하던 것과 똑같은 태도로 대한다. 형식적인 질문, 정해진 절차, 확답을 주지 않는 애매한 진단...

이반은 자신이 심문하는 자가 아니라 심문당하는 자, 판결하는 자가 아니라 판결받는 자의 위치에 서 있음을 직감한다. 평생 타인의 운명을 판결로 결정해온 사람이, 이제 다른 누군가의 진단에 자신의 운명의 향방을 맡기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이반이 세계를 대해온 방식이 그대로 그에게 되돌아오는 구조는 이 작품이 지닌 매우 중요한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이반과 의사를 비롯해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을 특별히 선악으로 규정하기 어려우며, 세속을 살아가는 인간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반은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보편적 명제를 도출한 그 유명한 삼단논법마저 부정했다. 이는 카이사르를 포함한 인간 일반에게 해당하는 진리일 뿐, 자신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진실임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문상 자리에서 표트르 이바노비치 역시 친구의 죽음 앞에서  언젠가 자신도 죽으리라는 자각 을 애써 떨치고  죽음을 남의 일로 치부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반의 득병과 죽음은 그 한 사람의 예외적 비극이 아니라 죽음을 추상적 명제로만 받아들이고 자신의 구체적 운명으로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모든 인간의 자화상인 셈이다.

이 부메랑 구조는 아내와의 관계에서도 반복된다. 이반이 병으로 고통받는 동안, 아내 프라스코비야는 정해진 사교 일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는 극장에 가고, 딸의 혼사를 챙기고, 남편의 병실에 들어올 때조차 관례적으로 연습된 연민의 표정을 지을 뿐이다. 이반 일리치가 결혼생활에서 누려야 하는 것은 식사, 아내가 제공하는 편리함, 잠자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아내가 죽어가는 그에게 보인 행동 양태  또한  이반의 그것과 놀랍게 닮아있다.

이 작품에서 사회적 지위나 명예를 탐하지 않고 죽음조차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유일한 인물은 '게라심'이다. 그는 농민 출신의 젊은 하인으로,  "우리 모두는 죽습니다, 왜 제 수고를 아끼겠습니까"라며 이반의 곁을 지킨다.
그는 이반으로 표상된 세속적 인물군과 대척적인 위치에 있으며, 출현 빈도는 많지 않지만 이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제법 크다. 게라심은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함축한 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실 '게라심'은 현실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  다분히 이상화된 전범적 인물이라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이반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보인 심리 변화나 주변 인물들의 행동양태  묘사에 함축된 '리얼리티'가 게라심에게는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세속적 욕망에 충실하고 사회적 규범과 제도 속에서 안온한 삶을 영위하다 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하며 겪게 되는 심리 변화까지, 이반 일리치의 삶의 궤적(나아가 그 주변인물들의 모습까지)이 담보한 리얼리티야말로 이 작품의 진면목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는 이반 일리치가 주인공이고 죽음이 핵심화소인 이유이기도 하다.
  
'죽음'은 이반이  평생 법과 절차, 사교와 예의범절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타인과 관계 맺어온 그동안의 세계와 달리 그 어떤 사회적 관계나 매개로 해결할 수 없는 현상이며, 그렇다고 회피할 수도 없는 그 무엇이다.

  병이 깊어갈수록 육신은 망가지고 통증은 심해진다. 아편은 임시방편일뿐 근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죽음이 점점 가까이 다가올수록 이반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반추하며 정말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통증'이 아니라 '거짓'임을 깨닫는다. 그것은 주변인들의 상투적 위로이고, 아내가 병실에서 짓는 연습된 표정이며, 무엇보다 그 자신이 판사로서, 남편으로서, 사교계의 일원으로서 평생 연기해온 '모범적인 삶' 그 자체이다.

아들 바샤가 아버지의 손을 잡아 자기 입술에 대고 우는 순간, 이반은 처음으로 "그들이 불쌍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이반은 "용서해 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실제로 입 밖에 나온 말은 "보내 줘"였다. 얼핏 말실수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용서'는 관계적·윤리적 의무감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런데 몸이 완전히 무너지는 그 순간, 그 의무감보다 더 근원적인 육신의 고통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다는 절박함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용서해 줘' 대신 '보내 줘'는 윤리범주를 넘어선, 고통을 끝내고 싶다는 원초적인 절규에 가깝다.
그래서 "끝났습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반은 속으로 "끝난 건 죽음이야"라고 되뇌며  '그것은 더 이상 없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생명이 끝났다고 말했는데, 이반은 죽음 그 자체가 끝났다고  한 것이다.

명시적인 서술이 아니라 마치 선문답같은 문장으로 끝나는 이러한 결말은 해석시각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읽어낼 수 있다. 어쩌면 죽음이 끝났다는 말은 육체의 소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을 지배한 거짓의 의미에서 마침내 벗어나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인간은 죽기 직전까지 자신은 죽음의 사이클에서 벗어나 있다고 믿으며, 마치 영생할 것처럼 무언가를 욕망하고 탐한다. 타자의 죽음을 대하는 모습이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다가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그 또한 타자화 되고     누군가에게 예의상 조문해야 하는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가가 문제이다. 죽음이 임박하여 깨달았을때는 모든 것이 너무 늦은 것이다.

인간은 그런 존재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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