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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作 노(能) <망한가(望恨歌)>

자유글

by 무아(無我) 2025. 9. 20.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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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극장 하늘극장
○ 9월17일



'노(能)'는 6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일본의 대표적인 전통예능이다. 화려하고 극적인  '가부키(歌舞伎)'나 섬세한 인형극인 '분라쿠(文樂)'와 달리, '노'는 극도로 절제된 분위기 속에서 우아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가면극이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중세 일본의 미학과 불교적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다.

무대 위를 미끄러지듯이 걷거나 돌거나 앉거나 서는 움직임 그리고 부채를 든 손을 천천히 들거나 내리는 일련의 동작들을 통해 극을 이끌어가는  배우들의 연기가 '노'의 미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에도시대 '노'는 막부로 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은 대신 의전용 공연으로 막부에 봉사했으며, 정형화된 연기로 정해진 레퍼터리만 무대에 올렸다.

오늘날 공연되는 대부분의  '노' 작품은 무로마치 시대(1338~1573)에 창작된 것이며, 정형화되고 양식화된 틀 속에서 전승되고 있다. 이처럼 고전 작품들 중심으로 전승되다보니, 현대  일본에서 '노'는 전통예능으로서만 의미를 가질 뿐 대중들의 호응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동시대 청중들과 소통하기 위한 노력의 한 방편으로 새로운 레퍼터리인 신작 '노(能)'를 만드는 작업이 시도되기도 한다.

<망한가(望恨歌)>는 도쿄대학 명예교수 '타다 토미오(多田富雄)'가 집필한 신작 '노(能)' 작품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 징용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1993년 도쿄 국립 노가쿠도(能樂堂)에서 초연되었으며, 이후 교토, 오사카 등 일본 각지에서 여러 차례 공연된 바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공연은 순탄치가 않아서 2005년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으로 공연되었으나 그다지 주목받지는 못했다.

'노'는 매우 정형화된  양식을 지닌 예능이라고 했다. '노 배우(能役者)'는 '시테가타', '와키가타', '교겐가타(狂言方)' 그리고 '하야시가타'로 구분한다.

'시테가타'는 주역이나 '쯔레(連れ)', '고겐(後見)', '지우타이', '쭈꾸리모노(作物)'의 제작, 막 열기, 옷의 장식달기 등 다양한 역할을 겸하기 때문에 '노가쿠사(能樂師)'중에서 인원수가 가장 많다.

'와키'는 시테의 등장을 유도하는 조연으로, 여행의 승려이거나 칙사와 같은 역할이 많다. 시테가 신의 화신이나 무장의 망령 등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캐릭터인데 비해, 와키는 반드시 현실의 인간으로 남성이 담당하는  것이 원칙이다.

'교겐가타(狂言方)'는 연극 대사를 중심으로 연기하는 배우를 가리키며, '하야시가타(囃方)'는 '노'의 음악을 담당하는 부류를 가리킨다.

<망한가>의 등장인물은 노의 양식에 따라 구분해 볼 수 있다.

-시테(주인공): 이동인의 과부, '소꼬리 노파'
-와키(상대역) : 큐슈의 승려
-교겐가타(연극적 대사를 하는 배우) : 한국의 마을 사람

이밖에 '지우타이(地謠)'라고 하여, 노래를 담당하는 배우들이 있다. '지우타이'는 전 작품을 끌고 가는 작가의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그 비중이 작지 않다. 시적인 노래로 가면을 쓴 '시테'의 내면 세계를 드러내며 정서를 고양하고 위무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노'에는 노녀(老女)를 주인공으로 한 일련의 작품들이 있는데, 이를 '로죠모노(老女物)'라고 한다.  '여성'과 '늙음(老)'을 표현해야 하는 로죠모노의 연기는 고도의 기량과 깊은 정신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높은 예술적 경지에 도달한 배우가 아니면 제대로 소화하기 어려운 배역이다.

<망한가>는  '로죠모노'의 성격을 지닌 작품으로, 극 구성이나 대사도 '노'의 양식적 특성을 비교적 충실히 지니고 있다.

'노'는 크게  현재 진행형으로 사건이 진행되는 '겐자이노(現在能)'와 시간을 과거로 거슬러 가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무겐노(夢幻能)'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이 가운데 노를 대표하는 것은 '무겐노'이다.

'무겐노'는 한 승려가 긴 여행 끝에 어느 마을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승려 앞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 또는 남자가 나타나 이 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극이 진행됨에 따라 화자가 바로 이야기 속의 주인공임이 밝혀진다. 자신의 정체를 알리고 모습을 감춘 주인공은 극의 후반에서는 생전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 과거를 재현하고 춤을 춘다. 현세에 대한 미련, 추억, 원한 등이 이들의 이른바 성불(成佛)을 막고 이승에서 떠돌게 하는 것이다.

승려는 이 영혼이 이승과의 인연을 끊을 수 있도록 염불을 드리고 이에 유령은 성불하게 되는데, 작품에 따라서는 유령이 끝내 성불하지 못하고 영원히 이승을 방황하는 채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무겐노의 특징은 '시테 일인주의(一人主義)' 또는 '시테 중심주의(中心)'라고 하여, 극의 전개가 주인공인 시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이를 상대역인 와끼가 시종일관 지켜본다는 설정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와끼는 시테가 등장하면 무대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그의 연기를 관객과 함께 지켜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노'가 진혼극적 성격을 지닌 것도 이러한 특징에서 비롯된 것이다.

<망한가>는 유령이 자신의 생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전형적인 무겐노의 형식을 취한 것은 아니지만, 노녀가 승려에게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고 춤을 추었다는 점에서 '무겐노'의 구조를 취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망한가>  무대는 '노'의 그것과 방불했다. 배우들의 통로가 양쪽으로 설치되었으며, 무대 중앙 뒤편에 지우타이와 고겐(後見) 등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들 배우 앞쪽으로 흰색 휘장이 쳐진 네모난 무대장치가 설치되었다. 무대장치의 한쪽 구석에는 메마른 풀잎 아래로 오색의 가는 천이 드리워진 이 장치는 노파가 거주하는 오두막집이다. 오색 천은 농신대에 매다는 오색 천을 상징하는 것으로,  한국 시골 마을의 집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는 아이들이 다가가면 쫓아내곤 하기에 '소 꼬리 노파'라고 불리는 이 노파가 무당과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무대 한쪽에서 '와끼'가 등장하며 본격적으로 극이 시작되었다. '와끼'는 큐슈 지역 승려로, 피리 연주와 함께 등장하여 자신을 소개하며
전라도 '단월'이라는 마을을 찾게 된 연유를 밝힌다. 그리고 '미치유키(道行)'를 통해,  승려가 큐슈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건너가 지리산 험준한 산을 넘어 전라도의 작은 마을에 이르렀음을 알린다.

'단월 마을'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이름이다. 또한 '이동인'이라는 이름도 가명이다. 조선에서 온 노동자의 유골을 모신 불당은 실제로 큐슈에 있다.

승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 마을에서 연행되어 큐슈의 탄광에서 목숨을 잃은 '이동인'이라는 젊은이가 쓰다가 만 편지를 전하기 위해 단월 마을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 편지는 일본에 끌려가기 전 일 년 남짓 함께 살았던 젊은 아내에게 쓴 것이었다. 큐슈에서 죽은 조선인 노동자의 유골과 유품을 추선 공양할 때 발견된 것으로 아내를 그리워하는 애절한 마음을 담은 편지이다.

이동인의 편지를 그의 아내에게 전달하기 위해 멀리서 찾아온 일본인 승려를 마을 사람은 처음에는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사정을 알고 그를 이동인의 아내가 사는  집으로 안내해 준다. 그리고  젊어서 남편을 잃은 아내는 재가도 하지 않고 죽은 이의 명복을 빌며 고독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꺼려 동네 아이들이 다가가면 쫓아내곤 하기 때문에 '소 꼬리 노파(牛尾老婆)'라고 불리면서 사람의 눈을 피해 살고 있다는 것 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와끼인 승려가 '소 꼬리 노파'의 집에 도착해서 노파를  찾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다. 승려가 찾아온 사연을 이야기하고 마침내 휘장이 걷혀지자, 그 안에  노파가 가면을 쓴채 정좌하고 있다. 승려가 편지를 전해주자, 그 편지를 읽고 있던 노파는 '우타이(謠)'로 "이제야 만났네”라며 절규한다. 노파는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사연을 승려에게 들려주며, 승려의 권유로 '한의 춤(恨舞)'을 춘다.

춤을 추기에 앞서, 노파는 무대 위에서 의상을 갈아입는데, 이 때 결혼식에서 신부가 입는 원삼을 본뜬 '초켄(長絹, '노'에서 주로 춤추는 여성이 입는 겉옷)'을 걸친다. 머리에는 작은 관 같은 것을 쓰는데, 이는 한국의 '족두리'다.

인상적인 점은 지우타이가 부르는 노래에 백제가요로 알려진 <정읍사>가 수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정읍사>는 아내가 달에게 남편의 안전  귀가를 기원하는 내용인데, <망한가>에서는 이미 세상을 떠난 남편에 대한 아내의 애절한 그리움을 드러내는 내용으로 변개하여 수용한 것이다.

"이렇게 매일 밤 매일 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생각하며 지새우는데
남편은 시장에 가 계신가요
산 정상 위로 보이는 북두칠성은
명도를 비추는 별이로다
조용히 걸으소서
진 곳을 디딜까 두려워라"

<정읍사>에는 없는 '북두칠성'이나 '명도'라는 표현을 더한 것은 그리워하는 대상이 망자임을 암시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이번 공연이 한일 협업의 성격을 띠다 보니, 일본 '노'형식으로 창작한 <망한가>에 한국의 농악과 상여소리 등이  더해지게 되었다.

공연이 시작되자, 일본 강제 징용에 끌려가기 직전 이동인의 혼례를 축하하는 농악 공연이 벌어지고, 상여소리가 이어진 것이다. 제법 긴 시간을 할애한 농악의 신명과 상여소리의 비장미는 강제징용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이동인과 인고의 세월을 보낸 그의 아내의 한맺힌 삶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듯했다. 여기에 더해 '노'의 형식인 <망한가>의 그 정적이면서 흐트러짐 없는 우아함으로 표현한 슬픔과 대비되는, 한국적인  신명과 한의 미학을 보여준 측면도 있다.

일본인이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 민족이 겪은 비극적 삶을 일본 전통예능인 '노(能)'  양식으로 작품화 한 것은 그 자체로 휴머니즘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작업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지만, 애써 인색하게 평가절하할 필요도 없을듯 하다.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라는 말이 있듯이, 한국에게 일본은 애증의 나라이다.  한국 예술은 '생성예술'의 성격이 강한 데 비해, 일본은 '완제예술'의 성격이 강하다. 이번 <망한가>  공연도  일본 예술이 지닌 미학의 한 단면을 잘 보여 주며 새로운 인식을 환기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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