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연극제 서울대회 참가작
○ 성수아트홀
○ 4월4일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첫 문장으로, 이 책의 성격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구절이기도 하다.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많은 작품으로 알려진 <인간 실격>을 처음 읽었을 때, 무언가 가슴이 꽉 막히는 답답함이 들기도 했고 때론 내면의 한자락을 들킨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암튼 주인공의 심리를 섬세하게 펼쳐낸 글을 보면서, 인간의 본질에 관해 새삼 많은 생각을 한 기억이 있다.
<인간 실격>에서 주인공 오바 요조는 1인칭으로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수기' 형식으로 써나간다. 그런데 서문과 후기를 보면,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소설을 쓴 '나'가 요조의 수기를 소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서문과 후기를 소설에 포함한 이유는 오사무가 작중 인물 요조를 내세워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려고 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요조는 어린 시절 인간에 대한 공포심과 불신감을 갖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위선과 폭력성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의 친구들이 뒤에서는 아버지의 개회사와 정당의 연설을 비난하면서 그 앞에 와서는 연설회가 성공적이었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이해하기 힘든 인간의 위선과 가식을 인식한다. 그리고 집안의 하녀와 머슴들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경험도 요조가 인간에게 혐오감을 갖게 된 요인으로 작용하는데, 그는 가족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이 겪은 상처를 말하지 않는다. 인간들이 자신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요조가 아버지로 부터 선물을 받게 되었을때,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원하는 것으로 결정하는 장면이 있다. 이는 아버지가 매우 권위적인 인물이라는 점과 요조는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아이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 속에서, 요조는 자기 방어기제로 '익살'을 선택한다. 공포와 불안을 감추고 자신의 나약한 내면을 들키지 않기 위해 본 모습 대신 광대짓을 택한 것이다.
중학교 시절 선생님을 웃기려고 흥미도 없는 주제로 작문하여 제출하고, 체육시간에는 친구들을 웃기기 위해 일부러 엉덩방아를 찧는 등, 익살로 포장된 가식적 행동으로 인간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을 회피하고 처세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고등학생 시절 친구 호리키의 소개로 들어가게 된 공산주의 독서회 모임에서 긴장된 분위기를 익살스런 행동으로 풀며 인기를 얻지만, 구성원들과 진실한 소통을 위해 노력하지는 않는다. 요조의 이러한 익살 연기는 인간에 대한 불신과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진정한 자아로 살아가기를 포기한 절망적 자구책이라 할 수 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요조는 자포자기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술, 담배, 창녀 등을 통해 삶을 지탱해 나간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조가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불안과 공포로 부터 벗어나고자 한 것은 여성들과의 관계맺기를 통해서이다. 요조는 여성을 통해 구원받기를 갈구한 것처럼 보인다. 그가 만난 여성들은 범죄자의 아내, 과부, 장애인 등 주로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에 속하는데, 이들 여성에게 때론 연민을 느끼고 그동안 방어 기제로 사용한 가식적인 행동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랑의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요조가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익살스러운 행동을 연기하지 않게 되는 인물이 카페에서 일하는 여성 쓰네코이다. 그녀의 남편은 사기범죄로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데, 요조는 외롭고 초라해 보이는 쓰네코에게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삶에 완전히 지친 모습을 발견한다. 그녀에게 동질감과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함께 살기로 결심한다. 요조가 쓰네코에게 진실한 마음과 가식적인 익살 사이를 오가는 모습을 보이지만, 기존의 삶의 양태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나 극도의 가난으로 절망감을 떨치지 못한 요조는 쓰네코와 동반 자살을 기도한다. 그의 자살 시도는 의미 없고 고통스러운 삶을 중단하려는 욕구의 반영이자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의 표현이었으나, 그마저도 실패하고 쓰네코만 죽는다.
시즈코와의 만남은 어떤가. 시즈코는 잡지사에서 일하며, 남편과 사별하고 다섯 살된 딸과 같이 지내는 여성이다. 요조는 시즈코와 동거하면서 경제적 자립을 위해 잡지사의 무명 만화가로 활동하는데, 이는 그동안의 무기력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도한 본격적인 노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즈코의 딸 시게코가 요조에게 "진짜 아빠가 갖고 싶다고 하자, 시게코에게 두려움을 느낀 요조는 시즈코와 시게코의 행복을 망치고 싶지 않다며 그들을 떠난다. 그는 여전히 다른 사람과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감과 인간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그 다음 만난 여성이 요시코이다. 요조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전혀 의심하지 않는 요시코에게서 순수함과 신뢰성을 발견하고 처음으로 결혼을 결심한다. 하지만 그녀가 집에 드나들던 장사꾼에게 성폭력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삶에 대한 기쁨과 모든 희망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며, 요조는 신에게 묻는다. "신뢰는 죄인가요?" "무저항은 죄입니까?"
결국 여성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기 회복을 시도한 요조의 노력은 실패로 끝나며, 알코올 중독, 모르핀 중독으로 방황하는 요조의 삶에 대한 절망감은 점점 더 깊어진다. 자신의 불행은 모두 그의 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항의할 수 없으며 세상 사람들 모두 그를 뻔뻔스럽고 파렴치한 인간으로 여길 것이라며 자책하는 요조... 마침내 그는 정신병원에 가게 되고, 스스로 '인간 실격'이라며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하는 극한의 상황에 도달한 것으로 끝난다.
연극 <인간 실격>은 소설 <인간 실격>에 제시된 요조의 수기를 바탕으로 극을 전개했는데, 가장 인상적인 표현 수법은 '가면'을 활용한 것이었다. '가면'은 요조가 '익살'이라는 광대짓을 통해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추는 행동양태를 드러내는 데 제격이었다. 다수의 배우가 가면을 쓰고 등장하여, 때론 요조의 심리를 부각하기도 하고 때론 상대역을 하는 등 극의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런데 극에서 요조가 여러 여성과의 만남을 무대화 하는 과정에서 키스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거나 비록 간접화의 방식이라 하더라도 성폭력 장면을 재현하는 등 지나칠 정도로 성적 이미지를 강조한 것은 자칫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왜곡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했다.
무엇보다도 '요조'역을 담당한 배우의 복장이나 외양이 극중 인물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어서,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요조'가 다자이 오사무와 동일인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자전적인 요소가 많은 것 또한 사실이어서, 요조에게서 다자이 오사무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되는 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자이 오사무의 움푹 패인 볼과 쑥 들어간 눈 그리고 상실감에 젖은듯한 표정이 자아낸 페이소스를 극중 인물 '요조'에게서 기대한 것은 무리였다.
소설 <인간 실격>과는 다른, 연극<인간 실격>이 구현한 새로운 주제의식을 찾기도 어려웠다. 원작의 자장에서 벗어나 새로운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작업이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창의적인 발상과 구성을 보여주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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