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에서 연극 <오펀스(Orphans)>(미국 작가 라일케슬러 作)를 관람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어린 아이를 모두 돌볼 수 없어서 집집마다 엄마를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이에게 엄마는 하느님이자 세상의 전부인 셈이다.그런데 이 작품은 엄마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고아 형제 트릿과 필립 그리고 고아 출신의 시카고 갱스터 헤롤드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연극의 주인공은 근원적 결핍을 경험한 고아들이다. 그리고 공연 공간은 작품 내내 형제의 집으로 설정되었다. 좀도둑질로 동생을 보살피는 형 트릿은 어릴 적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버림으로 인해 받은 상처로 동생에게 집착에 가까운 행동을 보인다. 욕설을 입에 달고 폭력적이며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트릿은 동생을 바깥 세상으로부터 차단하고 글도 배우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동생 필립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아이로, TV 시청과 신문에 실려 있는 낱말 맞추기 그리고 책을 통해 형 몰래 세상을 배워나간다.
그런데 헤롤드가 등장하면서 끝날 것 같지 않은 이들의 삶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세상과 단절된 필립이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고 형 트릿이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형제와 헤롤드의 만남은 다분히 극적이다. 어느 날 트릿은 술에 취한 해롤드를 납치해서 집으로 데려 오면서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는 것이다. 알고 보니 헤롤드 또한 어려서 고아로 자랐으며, 그는 고아원에서 겪은 일을 형제에게 들려준다. 특히 그가 "엄마, 엄마, 엄마!"를 외치며 절규하는 장면은 이들의 상처와 아픔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헤롤드가 필립에게 세상을 만나게 하는 과정은 상징적인 장면으로 제시되었다. 신발, 창문, 지도가 그것이다. 헤롤드는 필립에게 구두 신는 법을 알려 주는데, 신발은 자기 정체성의 상징이자 세상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창문'은 폐쇄된 공간에서 세상으로 나아가는 통로이자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다. 헤롤드가 필립에게 준 지도는 세상 그 자체로, 필립은 지도를 통해 세상의 모습과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정확하게 알게 된다. 헤롤드는 필립에게 인간세상보다 넓은 우주에 대해 이야기해주며 필립이 거주하는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를 정확하게 알려준다.
형 트릿은 마치 동생을 헤롤드에게 빼앗기는듯한 기분에 엇나간 행동을 보이기도 하나, 그 또한 헤롤드의 도움으로 삶을 바꾸어 나간다.
이 연극은 150분간 공연되었는데, 1부 60분 인터미션 15분 2부 75분으로 구성되었다. 굳이 공연 시간을 주목하는 이유는 1부와 2부가 확연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1부에서는 형제의 삶이 바뀌기 이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2부는 확연히 달라진 형제의 삶을 보여주었다. 1부의 무대 공간은 무언가 어지럽게 널려져 있고, 형제들은 마치 자신들의 처지를 암시하듯 징검다리같이 놓은 의자 위를 오가며 매우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2부가 시작되자 무대는 말끔해졌으며, 트릿은 정장 차림으로 등장했다. 헤롤드 덕분에 모든게 달라진 것이다.
헤롤드가 이들 형제의 삶을 변화시킨 동력은 무엇인가? 그건 '격려'였다. 이제 진부한 말이 되어버렸지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은 언제나 진실이다.
헤롤드가 고아로 자라서 어떻게 시카고의 갱스터가 되었고 그가 어떤 교육을 받았으며 어떻게 형제를 변화시킬 수 있을 정도의 교양과 철학을 갖게 되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이는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통찰로, 어떤 배움보다 값진 깨달음일 것이다. 헤롤드 덕분에 필립은 지도를 보며 바깥에 나갔다가 혼자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으며, 트릿은 더 이상 좀도둑질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결말에서 헤롤드는 총에 맞아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이 또한 어떤 상징으로 다가왔다. 필립과 트릿이 이제 더 이상 헤롤드가 없어도 자신들의 삶을 주체적으로 가꾸어갈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부모 없이 자란 아이를 고아라 하지만, '고아 의식'도 있다. 나라나 전통과 같은 정신적 문화적 지주를 상실한 개인들에게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고통스럽고 불안하고 고독한 의식을 가리키는데, 어떤 면에서 우리는 저마다 불안하고 고독한 '고아의식'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격려하고 위로하고 칭찬하는 일... 이는 특히 고독한 개인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더없이 소중하고 값진 연대의 징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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