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커의 대명사가 된 '미저리'. 소설과 영화로 먼저 알려진 작품이어서 사실 대강의 줄거리는 알고 있었지만, 연극으로는 어떻게 풀어갈까 궁금해서 망설이다 설날 관람했다.
소설이나 영화와 달리, 연극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갈래이므로 동일한 텍스트라 해도 다르게 풀어갈 수밖에 없다. 연극 <미저리>는 원작의 스토리라인을 그대로 수용하되, 애니와 폴을 중심으로 극을 이끌어갔다. 애니가 폴을 치료한다는 명분으로 가두어놓은 자신의 집이 무대 공간이었다. 회전무대를 삼등분하여 폴이 누워있는 방과 거실 그리고 대문 바깥을 설정하고, 극중 상황에 따라 무대가 회전하며 변화를 준 것이다. 특히 다친 폴이 누워있는 방안이 극중 무대의 대부분을 치지했으며, 애니와 폴이 주고받는 대화가 차지하는 비중 또한 상당히 컸다. 보안관이 몇 차례 등장했지만, 역할은 미미한 편이었다.
더 좁혀 말하면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은 애니였다. 애니는 자신이 열렬히 좋아하는 작가 폴이 심한 부상을 당하자, 그를 고립된 공간에 가두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독점하려고 한다. 폴이 집필중인 소설 <미저리>를 읽고 미저리를 죽는 것으로 설정한 것에 불만을 품은 애니는 미저리를 살려내는 쪽으로 고치라며 폭력적인 방식으로 폴을 압박한다.
그녀가 보인 행태는 사실 병적이다. 작가가 쓴 소설 내용을 문제 삼는건 그녀가 현실과 허구를 분리하지 않고 넘나든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마치 드라마를 현실로 착각하는 것처럼...
상대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지 않고 자신의 잣대에 맞추게 하려는 것 또한 엄청난 폭력이다. 작중인물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자신이 추구하는 작품세계를 그려가는 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몫인데, 이를 제약하려드는 것은 작가의 존재감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미저리를 스토커의 대명사처럼 사용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이 제기한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미화하고 합리화하며 상대를 핍박하는 일은 일상에서 다반사로 일어난다. "권력은 자신의 의지를 대상에게 관철하는 힘" 이라는 말이 있는데, 사랑을 권력으로 착각하는건 불행하다. 진부한 말이지만, 사랑은 상대를 존중하고 외려 나를 낮출때 그 빛을 발한다.
남녀 불문하고,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곳곳에 소시오패스가 있다. 영혼이 건강한 사람을 만나는 것도 복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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