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울림 소극장
○9월 17일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리부트>를 관람했다. 이 작품은 2020년 초연되었는데, 이번 '2026 산울림 고전극장'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무대에 올리면서 이전 시즌 공연을 새롭게 올린다는 의미로 '리부트'라고 했다.
그리스 신화의 여신들은 본래 인간 공동체가 감당해야 할 삶의 영역들을 나눠 관장하도록 역할이 부여된 존재이다. 결혼과 가정 질서는 헤라, 사랑과 생식 그리고 아름다움은 아프로디테, 사냥과 야생 그리고 처녀성은 아르테미스가 맡는 식이다. 이는 다신교 체계 특유의 '기능 분화' 원리로, 하나의 전능한 신이 아니라 여러 신이 삶의 각 영역에 대한 제의와 기원의 대상이 되어야 공동체의 다양한 필요(결혼의 안녕, 사랑의 성취, 사냥의 성공과 처녀의 보호 등)를 각각 충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각각의 여신이 지닌 성격적 특질은 이러한 '관장 영역'을 인격화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 연극은 신화 속 각 인물이 지닌 이미지를 살리되 신화적 맥락을 세속 인간의 남녀관계의 맥락으로 전환하여 재맥락화하여, 현실에서 있을 법한 세 유형의 전형적 여성 인물로 형상화하여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신화에서 각 여신이 지니고 있던 다층적 상징성은 단순화되고 하나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고정되는 면모를 보인다. 헤라의 '질서'는 '질투하는 아내'의 편집증으로, 아프로디테는 '요부'로, 아르테미스는 '냉담한 독신녀'로 형상화 된 것이다. 작가는 신화의 변용이나 재창조보다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신화를 소재화했다고 보는 편이 온당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작가는 신화속 여신들을 가져와 지금 이 곳에서 여성들이 고민하는 욕망의 문제와 남성과의 관계성 문제를 연극적으로 제기한 것이다.

무대에는 벽면에 올림포스 산을 상징하는 월계수 잎이 장식되어 있고 바닥에는 네 개의 의자만이 놓여 있다. 헤라와 아프로디테 그리고 아르테미스는 제우스가 소집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올림푸스산으로 오게 되는데, 이후 극은 세 인물이 펼치는 논쟁적 담론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결혼을 중시하는 헤라는 '신혼여행 300년'을 그리워하거나 제우스의 외도를 알면서도 "가정을 지키고 싶은 게 잘못이냐?"며 항변한다. 헤라의 응징 대상은 제우스가 아니라 그의 상대 여성과 자식이며, "왜 같은 여자끼리 다퉈야 되느냐"는 반론에도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않는다.
아프로디테는 여성으로서 매혹하는 힘이 가장 강력한 무기임을 잘 알고 있어서, 자유분방하게 여러 남성들과 어울리며 성적 욕망을 충족하는 인물이다. 여성으로서 자신의 성적 욕망에 충실한 삶이 처벌과 낙인의 대상이 될 수 있음에도 그녀는 이러한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폭력적 연인에게 상처받은 뒤에도 "사람 자체를 불신하고 싶지 않다"며 다시 사랑을 원하는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아도니스의 죽음 앞에서는 무너지는 슬픔을 드러내기도 한다. 아프로디테는 욕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욕망을 표현했을 때 돌아오는 사회적 인식과 반응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아르테미스는 결혼을 거부하며 남성에 대한 적대적 인식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아버지 제우스의 바람기뿐만 아니라 이를 묵인하는 엄마 헤라의 행태를 신랄하게 비난한다. 그런데 처녀성을 중시하고 결혼을 거부하던 아르테미스는 오리온과 사랑에 빠지며 남성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아폴론의 조롱에 발끈해 승부욕을 발동하다 의도하지 않게 사랑하는 오리온을 활로 쏘아 죽이게 되는 비극을 경험하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 연극에서 남성 배역도 제법 존재감을 드러냈다. 공연 내내 세 여성 인물은 거의 무대를 떠나지 않은 반면, 두 명의 남성 배우는 여러 인물 역할을 소화하며 장면에 따라 무대를 들락거리며 상대역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제우스, 아레스, 아폴론을 이강우 배우가 도맡고, 헤파이스토스와 알페이오스, 아도니스, 오리온은 김한빈 배우가 도맡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강우 배우는 헤라를 억압하고, 아프로디테를 유혹한 뒤 그 관계를 조롱거리로 만들고, 아르테미스의 능력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깎아내리는 등 여성을 억압하고 가해한 위압적인 역할을 도맡았으며, 김한빈 배우는 버려진 아들, 폭력적 연인, 죽은 애인, 죽인 연인 등 각 여신이 무언가를 잃게 되는 모습에 해당하는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이다.
이강우 배우는 키도 크고 덩치가 있어서 위압적인 남성 캐릭터를 잘 보여주었으며, 김한빈 배우는 상대적으로 왜소한 체구로 유약하거나 의존적이거나 여성친화적인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보여주었다.
헤라와 아프로디테 그리고 아르테미스는 미혜, 혜수, 혜경으로 바꾸어도 아무 문제 없을 정도로 현실에서 접할 수 있는 여성들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성의 욕망과 남성과의 관계에 관한 그녀들의 논쟁적 담론 또한 현실에서 있을 법한 유형화된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신화 속 인물을 차용함으로 해서 현실과 일정한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고, 속물적 욕망처럼 보이는 인간의 본성이 실은 오랜 역사적 연원을 가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측면이 있다.
결혼과 사회적 체면 혹은 시선을 중시하는 헤라, 철저하게 타고난 본원적 욕망에 충실한 아프로디테 그리고 금욕과 윤리를 중시하는 아르테미스...
연극은 이 가운데 어느 한쪽의 시각을 지지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랑과 남자에 관한 한 냉혈한처럼 보이는 아르테미스가 오리온과 비극적 사랑을 한 삽화를 결말 직전에 배치한 것은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이 세상은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남과 여는 어떤 형태로든 관계 맺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 주인공들이 무대 전면에 나선 반면 남성은 상대역으로만 등장하고 여성의 발화를 통해 타자화된 모습으로만 제시되었기에, 남성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작가 한송희는 이 작품에 배우로 출연하여 헤라 역을 맡았다. 작가이자 배우로서 여성의 목소리를 표출한 셈인데, 그렇다고 해서 선악구도 등 극단적이고 평면적인 시각으로 접근한 것은 아니어서 연극을 관람하면서 불편한 느낌 없이 몰입할 수 있었다. 남성이나 여성 모두에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거울'같은 공연이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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