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 8일
○ 열린극장


극단 가마골의 <체온(Fever)>는 등장 인물이름 자체가 서사인 작품이다. 안즐박이(앉은뱅이), 농자심이와 안벙어리(말 못하는 이), 봉사석이(눈먼 이)..이들 인물들의 이름은 고유명사이자 그들이 결핍된 존재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장애란 개인의 신체적 조건인가, 아니면 세계가 그들에게 붙여놓은 낙인인가.
대형 산불이라는 재난은 이 낙인의 세계를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극적 장치이다. 자본과 시스템에서 이미 소외되어 있던 이들이, 이제는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 재난 앞에 놓인다. 그들을 구하는 것은 소방대원 요답이다. 요답은 불길 속에서 목숨을 잃으며, 넝마사내를 매개로 자신의 몸을 장애 인물들에게 나누어준다. 앉지 못하던 이가 걷고, 말 못하던 이가 말하고, 보지 못하던 이가 보게 된다. 한 사람의 죽음이 여럿의 '정상성'으로 전환되는 이 장면에서, 체온은 문자 그대로 몸의 온기이자 생명 그 자체의 등가교환 단위가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넝마사내는 관음보살을 연상시키는 탈을 썼다는 점이다.
이 구도에서 눈여겨볼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 나눔의 역할을 세속의 누구도 아닌 넝마사내(관음보살의 형상을 한 존재)가 수행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희생을 초월적 존재의 손을 거쳐 완성시킴으로써, 극은 이 구원을 단순한 의학적 장기이식이 아니라 종교적 의례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자비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관음의 형상이, 실제로는 산 자의 죽음을 재료 삼아 구제를 수행한다는 점에서 이 자비는 순수하지만은 않다. 다른 하나는 '정상이 됨'이 곧 구원인가 하는 물음이다. 극은 이 전환을 감동적으로 그리면서도, 장애를 다름이 아니라 결핍으로, 그 결핍이 채워져야만 완결되는 서사로 전제한다는 근본적인 아이러니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요답의 희생이 숭고할수록, 장애 그 자체로는 완결될 수 없다는 전제도 함께 짙어지는 셈이다.
불을 관장하는 숯쟁이는 세상을 태우는 재앙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그 불을 다스릴 줄 아는 유일한 존재라는 점에서, 파괴와 통제 사이, 가해와 조력 사이에 걸쳐 있다. 넝마사내가 죽음을 구원으로 전환시키는 존재라면, 숯쟁이는 재앙을 다스리면서도 완전히 길들이지는 못하는 존재다. 둘 다 인간과 초월 사이의 매개자이되, 그 매개가 완전한 구원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극은 손쉬운 해피엔딩을 거부한다.
<체온>이 묻는 것은 재난 속 생존의 문제를 넘어, 구원이 누구의 희생으로 완성되며 그 구원이 진정 완결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요답의 죽음으로 장애 인물들이 얻은 것은 온전한 회복인가,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부채인가. 극은 이 물음에 답하지 않은 채, 응급치료를 받는 중인 세계의 이미지로 막을 내린다.
부산을 근거로 삼아 활동하는 가마골의 작품인데다 드라마투르기를 쓴 김남석 교수의 역할이 반가웠다.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이고 음악(알고 보니 AI를 활용하여 작곡한 곡이라 한다)도 극적 상황을 부각하는데 일조했다.
우의적 성격이 강하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데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직설적 화법으로 제시한 것은 아니어서 다소 난해하게 느껴진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난해함은 오히려 이 작품이 답을 서두르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요답의 체온이 옮겨간 뒤에도 무대는 완결된 회복을 보여주지 않는다. 연극이 끝난 뒤에도 응급치료는 계속되고 있으며, 그 치료가 언제 끝나는지 기약이 없다. 이는 온전히 관객의 몫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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