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서밀러作
○ 극단 백수광부 20주년 기념
○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 8월 26일


아서 밀러 作 연극 <다 내 아이들>( 원제는 'All my sons')은 가족주의와 보편적 인간애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제명에는 내 가족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아이 역시 나의 책임과 무관하지 않은 존재라는 의미, 즉 인간은 누구나 소중하다는 보편적 인식이 함축되어 있다.
밀러는 '어느 딸이 진실을 고발하여 아버지의 부도덕한 행위를 단죄한 실화'에 바탕하여 극화했다고 한다. 전쟁 중 결함 있는 부품을 군에 납품한 사업가를 그의 딸이 당국에 고발했다는 것인데, 밀러는 이를 희곡화하면서 딸을 아들로 설정하고 문제의식을 예각화하여 드러냈다. 어떤 내용을 다룬 연극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하면 이러하다.
자수성가한 사업가 조 켈러는 전쟁 중 군용 전투기 부품을 납품하며 큰 성공을 거두지만, 출하 직전 발견된 결함을 묵인한 탓에 스물한 명의 조종사가 추락사하는 참사가 벌어진다. 조 대신 수감된 동업자가 있었고, 둘째 아들 래리는 마지막 비행 이후 실종된 채 돌아오지 않았으며, 아내 케이트는 아직도 그의 죽음을 믿지 않는다. 그로부터 몇 년 뒤 평온해 보이던 어느 날, 옛 동업자의 딸 '앤'이 켈러가를 찾아오면서 가족이 애써 외면해온 과거사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내 가족만 무사하면 된다'는 신념 아래 감춰져 있던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

무대는 비교적 단출하며 사실주의적 장치와는 거리가 있다. 중앙에는 좁은 틈으로 강렬한 흰빛이 새어 나오는 문 하나가 서 있고, 그 회색 벽면에는 가늘게 갈라진 균열선이 사선으로 그어져 있다. 이 균열은 이 가족의 삶에 내재된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텅 빈 무대에 두 개의 의자만이 놓여 있다가 중간에 하나만 남는다. 두 개의 의자는 특정 인물에게 고정되지 않은 채 장면에 따라 조와 크리스가, 조와 케이트가, 크리스와 앤이 번갈아 앉는 자리이다. 그런데 극 중반 암전 사이에 의자 하나가 사라진다. 남아있는 의자 등받이에는 벽면에 있는 균열과 동일하게 생긴 선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이 또한 인물간 관계 나아가 가족 구성원간 갈등이 첨예화되며 소통이 단절되어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실종된 둘째 아들 래리의 출생을 기념해 심었던 나무가 있다. 그런데 극 초반 이 나무가 밤사이 바람에 부러져 땅에 떨어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나무는 극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죽은 래리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환기한다. 무대 바닥에 흩뿌려진 꽃잎은 겉으로 안정적이고 화려해 보이는 가족의 모습이자 곧 도래할 파국의 선혈처럼 보인다.

극의 핵심 갈등축은 가족주의 신봉자인 '조 켈러'&'케이트 켈러' 부부와 인간애를 중시한 그들의 아들 '크리스'이다.
아버지 조 켈러는 이웃과 농담을 주고받고 아이들과 경찰놀이를 하는 그는 지극히 평범하고 다정한 가장이다. 그는 '혈육과 금전밖에는 믿을 것이 없다'는 처세 논리를 지닌 인물이다. 극 후반부에서 "가족보다 중요한 건 없어. 걔가 무슨 짓을 해도 난 용서할 수 있어. 왜냐하면 내 아들이니까." 라는 대사는 그의 세계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에게 혈육이라는 울타리는 그 어떤 죄도 무화시킬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이며, 결함 부품과 관련하여 "너를 위해서였어, 너한테 물려줄 사업을 위해서"라는 말로 강변하는 것도 이러한 신념에 바탕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극단적 가족주의자이다. 지역주의가 극단화되면 더 작은 단위의 소지역주의로 쪼개지듯, 가족주의 역시 절대화되는 순간 패거리주의·분파주의와 동일한 논리 구조를 갖게 된다. '우리 편'의 경계를 어디에 긋든, 지역이든 혈연이든 그 경계 안쪽의 이익을 바깥에 대한 책임보다 우선시킨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주의에 기반한 조 켈러의 처세는 특별히 사악한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어떤 공동체에서든 경계 짓기의 논리가 횡행할 때 보일 수 있는 행태에 다름 아니다.
엄마 케이트는 어떤가. 케이트는 남편의 죄를 방어하는 대신, 그 죄를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 근원적인 방식으로 가족을 지키고자 한다. 그녀는 래리가 살아있다는 믿음을 단 한번도 저버린 적이 없다. 신문 기사를 근거로 내세우며 "여기서 래리보다도 더 오래 실종됐던 사람이 나타났던 기사가 바로 실렸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래리의 죽음을 인정하는 순간 남편의 죄 역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죄가 온 가족을 무너뜨리리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가장 철저한 가족중심주의자는 조가 아니라 케이트라고 할 수 있다.
부모와 달리, 아들 크리스는 인간적 가치와 공동체성을 중시하는 인물이다. 아들은 아버지가 세운 그 사업을 이어받고 아버지의 이름과 핏줄을 이어받은 존재인데, 그 아들이 바로 그 아버지의 죄과를 따져 물으며 인간적인 가치, 진정한 '인간됨'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강렬하게 제기한다.
자신을 위해서였다는 아버지의 변명에 대해 "그게 나를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요? 내가 그놈의 회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긴 하세요."라고 항변하며, "아버지는 나라도 없어요? 아버지는 사람들하고 같이 안 살아요? 아버지 도대체 어떤 존재예요?" "아버지 짐승도 아니에요. 어떤 짐승도 같은 종을 죽이진 않아요"라며 절규한다.
'앤'은 '존 디버'의 딸로, 한때 래리의 약혼녀였지만 지금은 크리스의 연인이 되어 이 집을 다시 찾아온 인물이다. 그녀가 찾아옴으로 해서 과거사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그동안 가려졌던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케이트가 처음부터 앤을 경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앤을 며느리로 받아들이는 일은 곧 래리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앤'에게 있어 아버지의 부정한 과거는 오랫동안 외면하고 싶었던 상처였지만, 그녀는 그 상처를 딛고 크리스와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 쓴다.
그녀는 래리의 마지막 편지를 간직하고 있었으며, 이 편지는 진실을 드러내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한다. 편지엔 "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라는 래리의 고통스러운 고백이 담겨 있었는데, 이는 아버지의 행태가 래리의 죽음을 초래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조의 이웃들인 짐과 수 베일리스 부부, 프랭크와 리디아 루비 부부 그리고 아이 버트는 그 비중이 크지 않지만 마냥 무거울 수 있는 극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약방의 감초 역할을 했다.
이 연극은 배우들의 열연 덕분에 몰입도가 높은 공연이었다. 케이트 켈러 역의 길해연은 오직 가족밖에 모르는 엄마의 표정과 몸짓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조 켈러 역의 박완규는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 같은 친근한 모습과 그 평범함 속에 도사린 위선을 과장없이 보여주었다.
크리스 켈러 역의 권다솔은 순진하면서도 맑은 영혼이 깃든 표정으로 인물의 순수한 정의감을 인상 깊게 표현했다. 그리고 앤 디버 역의 박희정은 청순하고 매력적인 외모로 극에 산뜻한 생기를 불어넣었다.
혈육을 위해서라면 세상에 대한 책임을 저버릴 수 있다는 논리로 무장한 조, 진실을 아예 부정함으로써 가족의 안온을 유지하려는 케이트... 오직 크리스만이 그 울타리 바깥,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타인들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며 가족의 이기성을 폭로했다.
아버지에게 "인간적으로 봐 달라"는 말이 자기 합리화의 도구였다면, 아들에게 그 말은 타자에 대한 배려 그 자체를 의미한다.
결국 조 켈러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죽음이 진정한 윤리적 각성의 결과인지 아니면 두 아들 모두에게 버림받은 상황에서 더는 물러설 곳이 없어 선택한 도피인지는 분명하게 알기 어렵다.
자살 직전 "그들 모두가 내 아들이었다"는 조의 발언은 가족주의 아니 가족이기주의적 삶에 대한 통한의 성찰로 보인다. 이미 모든게 늦었지만...
그러나 이 작품은 끝내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한 크리스가 "이게 아닌데"라는 외침을 반복하며 오열하는 것으로 극이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가 죄를 인정하기를 바랐을 뿐, 그 죽음까지 바란 것은 아니었다.
옳음을 지키려 했던 아들의 선택이 결국 가족의 파국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은, 보편적 인간애를 향한 정의로운 요구조차 그 대가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준다.
연극 <다 내 아이들>은 가족주의와 보편적 인간애라는 두 가치 중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 대신 소중한 가치를 지키는 일이 때로 소중한 가족을 잃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강렬하게 각인시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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