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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도리안 그레이>, 원작과는 또 다른 작품세계를 보여주다

뮤지컬

by 간다르바 2025. 4. 19.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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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
○ 4월13일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는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을  무대화한 작품으로,  원작과 마찬가지로 도리안 그레이, 헨리, 바질이 극의 중심 인물로 등장하여 작품을 이끌어 나갔다.

제명에서 보듯이, 도리안 그레이가 주인공이지만, 전반부에서는 헨리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 헨리 워튼은 도리안의 타락과 죽음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예술과 감각을 중시한 그는 도덕과 종교를 즐거움의 충동을 망각하게 한다며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어리석은 세상의 번잡함을 냉소하는 댄디이다. 그는 달콤한 말로 순진했던 도리언을 유혹에 빠뜨려 죄의식 없이 쾌락을 탐닉하게 한다. 헨리역을 맡은 최재웅은 자신만만하면서도 인간의 본원적 욕망을 긍정하는 헨리의 캐릭터를 잘 소화해서 보여주었으며, 가창력도 돋보였다.

도리안 그레이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영원히 유지하기를 소망한 인물로, 단순한 감각과 쾌락의 삶을 추구하며 주변의 비판에 상관하지 않고 감각적인 정열에 몰두하는 심미주의자이다. 윤소호는 흰옷을 입고 부드러우면서 조용한 어투를 사용하며 도리안의 이러한 순수하고 고결한  면모를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도리안은 헨리의 영향으로 조금씩 감각과 욕망을 긍정하며 쾌락을 추구하는데, 그 과정에서 연극배우 시빌 베인과의 만남 장면이 제법 비중있게 다루어졌다.

시빌은 도리안과 헨리 그리고 바질이 관람한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역을 맡았는데, 극중 연인 '로미오'는 안중에도 없고 객석의 도리안에게 온통 마음을 집중한다. 이런 모습에 대해 헨리는 그녀의 연기가 형편없다며 혹평하고 자리를 뜨며, 도리안 역시 그녀로부터 멀어지려 한다.

사실 원작에서도 시빌이 도리안에게 자신의 사랑을 드러낸 장면은 그 자체로 감동적인 데가 있다.  도리안을 만나기 전 지신의 삶은 연기밖에 없었다는 시빌..극중 삶이 전부고 진짜라고 믿었지만, 이제껏 열심히 투신했던 연극이라는 행위가 허무하고 공허하고 기만적이고 바보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시빌...도리안이 자신에게 더 위대한 것을 주었고, 따라서 모든 예술은 그 그림자에 지나지 않으며, 도리언 덕에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우쳤다는 시빌... 온 세상의 예술을 전부 합해도 도리만만 못하다며 느껴 본 적 없는 열정은 연기할 수 있지만 자신을 불처럼 타오르게 하는 열정은 연기할 수 없다는 시빌...

이렇듯 시빌은 예술이 환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도리언을 사랑하지만, 도리안은 예술이라는 환영에 실체를 부여한 시빌을 사랑한다. 도리안이 사랑했던 것은 시빌이 아니라 그녀가 연기하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믿었던 사랑이 허구임을 깨달은 시빌은 절망한 나머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도리안은 시빌의 비극적 자살을 슬퍼하기는 커녕, 오히려 현실에서는 좀처럼 경험하지 못할 미학적 체험의 고결함으로 대체했다. 시빌의 죽음을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예술적 요소를 갖춘 비극”으로 인식한 헨리나 “멋진 연극에 어울리는 근사한 결말”로 인식하는 도리안의 모습은 감각적 경험의 추구만이 중요할 뿐 어떠한 윤리적 가치도 전제하지 않은 것이다.

뮤지컬에서 시빌이 <죽음에서 만나요>라는 노래를 부르며 자살하는 모습과 이를 지켜보면서도 냉정하게 외면하는 도리안의 모습이 대비되며, 도리안이 타락해 가는 과정이 극명하게 제시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원작에는 시빌 베인의 남동생이 등장하지만 뮤지컬에서는 여동생 샬롯 베인이 등장하며 그 비중이 제법 크다는 점이다. 샬롯은 언니 시빌과 함께 <돌아올 그날까지>라는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언니의 죽음 이후 복수를 꾀함으로써, 언니의 슬픔과 절망을 극대화하고 도리안의 타락상을 부각하는데 일조했다.

바질은  예술 속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인물로,미는 곧 순수하고 선한 것을 의미한다고 믿고 이를 숭배하는 예술가이자 이상주의자이다. 작품 속에 자신의 비밀이 담겼다는 이유로 일생 일대의 작품을 출품도 하지 않고 도리안에게 준 것은 그의 이런 면모를 단적으로 잘 보여준다. 아름다움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보인 바질은 결국 도리안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극중에서 도리안이 바질과 키스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이 동성애자임을 보여주는 모습인데, 원작에서는 명시적으로 동성애자에 관해 언급한  내용은 없다. 그렇지만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실제로 동성애자였고, 도리안 그레이와 헨리 그리고 바질은 직간접적으로 작가의 삶이 투영된 인물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뮤지컬에 삽입된 동성애 장면이 근거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러차례에 걸쳐 남성 인물들 간 키스 장면을 설정한 것은 극적 흥미성을 배가하기 위해서였다고 판단된다.

시빌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바질을 죽이는 등 점점 타락하는 도리안의 면모는 붉은 조명의 활용과 '초상화' 그리고 욕망이 묻어나는 도리안의 억양과 말투 등을 통해 효과적으로 형상화되었다.

특히 '초상화'는 이 작품의 핵심 상징으로, 극에서도  무대 위를 오르내리며 매우 중요한 의미망을 조성했다. 초상화는 도리안의 또 다른 정신세계, 즉 ‘양심’을 표상한다. 초상화를 통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상적인 자아’를 확인하는 도리안은 ‘몸(육체)’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정신을 분리한 셈인데, 자신의 과오와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정신이 피폐해짐에 따라 초상화 또한 추하게 변모한다. 그런데 뮤지컬에서 초상화는 이러한 상징성과 의미를 효과적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반점 모양의 붉은 조명을 통해 도리안의 타락상을 나타냈을 뿐, 초상화 자체는 내면 의식을 보여주는 기능을 거의 하지 못한 것이다.

원작과 구별되는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의 특징은 결말에서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원작에서 도리안 그레이는 초상화가 지닌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의 정신을 다시 맑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나, 모두 실패하자 이에 괴로움을 느껴 ‘양심’의 표상인 초상화를 없애고자 했다. 바질 홀워드를 찌른 칼로 화가의 작품과 그 의미까지 전부 죽이고자 한 것이다. 과거가 죽고 나면 자유로워지리라 생각하면서...

도리안은 육체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다 악한 존재로 변모하고, 자신의 양심을 없앰으로써 악한 정신과 아름다운 몸만 남기기로 결심하고 칼로 초상을 찔렀다. 그 순간 쓰러진 도리언의 얼굴은 추하게 늙어버린 모습이며, 초상은 전처럼 젊고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였다.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고자 한 도리안의 몸은 양심의 파멸과 함께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바질 살해’와 ‘시빌의 자살’이 도리언에게 “양심”의 문제를 일깨우며 그의 죽음의 원인으로 작용한 셈인데,  여기에는 맹목적인 ‘유미주의’에 대한 비판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원작과 달리, 뮤지컬은 도리안이 바질을 살해한 후 자해한 모습을 보이지만,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행방이 묘연한 상황에서 결말을 맺는다. 초상화 또한 변함없이 아름다운 자태를 간직한 원작과 달리, 구체적인 형상을 제시하지 않아  모호성을 유지했다. 뮤지컬의 이러한 결말은  도리안을 윤리적으로 파멸시키기보다는 세인들에게 궁금증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로 남겨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철학적 사유나 상상력의 범위는 물론 소설이 훨씬 크고 깊다. 그렇지만 구성도 탄탄하고 배우들 연기력도 괜찮았고 넘버곡도 잘 짜여진 편이고  LED 영상과 조명도 적절하게 활용하여, 소설과는 또 다른 뮤지컬만의 묘미를 보여준 흥미로운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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