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5일 망우 묘지 공원에 있는 시인 박인환 묘소를 탐방하고, 용마산을 트레킹했다. 망우 묘지 공원에는 박인환 시인 외에, 한용운, 계용묵, 함세덕, 이중섭, 최학송, 방정환, 차중락 등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잠들어 있다.
‘망우’라는 낱말이 들어간 명칭은 중랑구 망우동 외에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망우는 근심을 잊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망우당은 곽재우의 호이다. 한자의 뜻으로 볼 때, 곽재우와 반드시 연관되어 사용된 지명이나 전설은 아닌 듯하다. 경상남도 의령에 곽재우 장군을 추모하여 세운 망우당과 경상북도 달성군 구지읍에 곽재우 장군의 묘가 있는 망우당굼이 있다. 그 밖에도 망우당묘라든지 망우당정각, 경기도 파주시 금촌동과 양주군 매곡리의 망우리 마을 그리고 망우리포, 망우릿골, 망우정, 망우제 같은 명칭이 다양하게 있다. 아무튼 망우라는 낱말이 들어간 지명은 묘나 정자와 관련이 있어 걱정을 잊고 쉬는 곳, 마음을 편안히 해 주는 곳이란 의미를 가진다. 특히 공동묘지가 있는 중랑구 망우동은 태조의 근심덜기와 함께 사후의 평안을 기리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지명으로 보인다.(출처 :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양원역에서 내려 망우 공원에 가니, 박인환 묘소 이정표가 보인다.
로맨티스트 시인 박인환
시인 박인환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모던보이, 명동,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늘 멋쟁이같이 옷을 입은 시인...
그는 마리서사(茉莉書舍)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김광균·이한직·김수영·김경린·오장환 등과 친교를 맺었다. 그런데 김수영과 박인환은 애증의 관계였다. 현실주의자 김수영은 로맨티스트 박인환을 양아치라며 심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박인환 사후 김수영이 쓴 산문 '박인환'에 그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 그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죽었을 때도 나는 장례식에를 일부러 가지 않았다. 그의 비석을 제막할 때는 망우리 산소에 나간 기억이 있다.
인환! 너는 왜 이런, 신문 기사만큼도 못한 것을 시라고 쓰고 갔다지? 이 유치한, 말발도 서지 않는 후기. 어떤 사람들은 너의 ‘목마와 숙녀’를 너의 가장 근사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 눈에는 ‘목마’도 ‘숙녀’도 낡은 말이다. 네가 이것을 쓰기 20년 전에 벌써 무수히 써먹은 낡은 말들이다. ‘원정(園丁)’이 다 뭐냐? ‘배코니아’가 다 뭣이며 ‘아포롱’이 다 뭐냐? (김수영 산문2, '박인환'의 일부)
김수영은 현재 한국현대시사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대표적인 시인이다. 이에 비해 천재시인의 요절이라며 한 때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 박인환은 그다지 주목 받지 못하고 평가절하된 측면이 있는데, 이렇게 된 데는 김수영의 영향이 매우 크다. 김수영은 박인환의 시에 보이는 생경한 시어와 감상주의에 불만을 품고, 그를 겉멋만 부리는 알량한 시적 기교의 소유자로 단정지었던 것 같다. 박인환이 사회 현실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도회적 감상주의에 탐닉했다는 점에서, 김수영의 비판은 어느 정도 일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망자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게 인지상정인데, 김수영이 세상을 떠난 박인환에 대해 혹독한 독설을 퍼부은 것은 컴플렉스가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시선도 있다.
박인환은 잘생긴 멋쟁이 시인이었다. 옷도 맵시있게 입었다. 박인환은 1948년 스물셋에 진명여고 출신의 이정숙과 결혼했고, 김수영은 1950년 서른에 이화여전 출신의 김현경과 결혼했다. 1921년생 김수영이 1926년생 박인환에게는 다섯 살 위의 형뻘이었지만, 김수영은 박인환보다 2년 늦게 결혼했으며, 첫 시집 출간도 4년이나 늦었다. 게다가 외모도 박인환에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로 김수영이 박인환에게 컴플렉스를 가졌을 것이라는 뒷담화가 무성했던 것이다. 김수영 또한 1968년 버스에 치여 4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니, 무엇이 진실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시인 박인환은 1955년 첫 시집《박인환선시집(朴寅煥選詩集)》을 낸 뒤 이듬해에 30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는 도시문명의 우울과 불안을 감상적인 시풍으로 노래한 점이 특징이다. 그의 대표작인 < 목마와 숙녀>가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1956년 작고 1주일 전에 쓰여진 <세월이 가면>은 배우이자 가수인 나애심이 노래로 불렀는데, 이에 관한 에피소드가 전설처럼 전한다. 박인환은 명동의 은성 다방(최불암 어머니가 운영하는 곳이었음)을 즐겨 찾곤 했다. 어느날 이곳에서 조병화, 이진섭, 나애심 등과 함께 자리를 갖던 중 박인환이 시 <세월이 가면>을 쓰자, 극작가이자 작곡가인 이진섭이 즉석에서 곡을 붙이고 이를 나애심이 노래로 불렀다는 것이다. 이후 이 노래는 현인, 박인희 등 여러 가수들이 불러 더욱 유명해졌다.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환 묘소를 탐방하고, 용마산으로 향했다.
용마봉에 얽힌 <아기장수 전설>은 사회 변혁을 꿈꾸는 민중들의 욕구와 좌절이 담긴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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