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쿠샤, 경희궁, 홍난파 가옥 탐방
10월 30일 딜쿠샤와 경희궁 그리고 홍난파 가옥 등을 탐방했다.
출발지는 광화문역...
새문안교회
예전의 건물은 온데 간데 없고, 어마어마하게 큰 건물이 우뚝 솟아 있다. 2014~2019년 현재의 교회를 신축한 것이다.


새문안 교회는 정동쪽에 있다가 1910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교회가 들어서기 전, 1902년 8월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 협률사가 이곳에 설치되었다. 협률사는 고종 재위 40주년 경축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2층 500석 규모로 지어진 황실 극장이다. 협률사는 1906년 문을 닫았으며, 2년 뒤인 1908년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재개장했다. 원각사는 1908년 11월 15일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으로 평가받는 <은세계>가 공연된 장소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새문안 교회를 지나 서울 역사박물관 방향으로 가니, 전차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돈의문 박물관 마을
한양도성의 서쪽 큰 문, 서대문이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돈의문은 1396년 처음 세워졌으나 1413년 경복궁의 지맥을 해친다는 이유로 폐쇄되었다가 1422년 현재 정동 사거리에 새롭게 조성된 것이다. 이때부터 돈의문에는 새문(新門)이라는 별칭이 붙었고, 돈의문 안쪽 동네는 새문안골·새문안 동네로 불리게 되었다. 1915년 일제는 도시계획이라는 명목 아래 도로확장을 이유로 돈의문을 철거했다.
돈의문박물관마을은 이웃한 종로구 교남동 일대와 더불어 2003년 ‘돈의문 뉴타운’ 지역으로 선정되면서, 기존 건물의 전면 철거 후 근린공원으로 조성될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서울시는 한양도성 서쪽 성문 안 첫 동네로서의 역사적 가치를 인식하고, 2015년 마을의 원형을 유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설정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돈의문박물관마을이 탄생할 수 있었다.



경희궁


숭정전(崇政殿)은 원래 경희궁의 정전이었다. 경희궁은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의 사저가 있던 곳이다. 광해군은 이곳에 왕기가 서렸다는 풍수설을 믿고, 왕기를 누르기 위해 즉위 9년인 1617~1620년에 궁궐을 건립하여 경덕궁이라고 했다.
숭정전은 1910년 일제가 경희궁을 철폐하고 일본인 자제들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를 설립할 때도 남아 있었다. 그 후 1926년에 필동 남산 기슭, 지금의 동국대학교 자리인 조계사 본전으로 사용되기 위해 이건되었다. 광복 후 그 자리에 동국대학교가 세워지면서 1976년 현재 위치로 옮겨져 학교의 법당인 정각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숭정전




경희궁을 둘러보고 서울 한양도성 순성길로 향했다.

홍난파 가옥
한양도성 순성길을 따라 올라가니 홍난파 가옥이 보인다. 원래 이곳은 영국인 베델이 거주했던 곳이라 한다. 베델은 누구인가?
대한메일신보 사장으로 잘 알려져 있는 베델은 일제 강점기 항일 대열에 동참한 외국인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매우 긍정적인 인물로 각인되어 있다. 배설이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베델은 영국 Daily Chronicle 특별 통신원으로 러일전쟁 취재차 한국을 방문했다. 힘없는 나라 사람들이 악착같이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는 모습에 조선인을 돕기로 결심했다. 베델은 양기탁과 함께 1904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인 베델이 사장인 신문사라 일본의 사전검열을 받지 않은 유일한 신문이었다. 이 신문은 일간지로 국한문 혼용판, 국문판, 영문판 이렇게 출간되었으며, 박은식 선생, 신채호 선생이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일본으로 가져간 기사를 보도해서 결국 다시 되돌려 놓게 하는 등 항일 활동에 앞장 선 언론이었다.
홍난파는 1935년에서 1941년까지 이곳에 거주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오리니스트로 실내악단 창시자인 홍난파는 음악 평론가이자 작곡가로, 한국 최초의 음악 잡지인 '삼광' 을 발행하기도 했다. 홍난파가 작곡한 곡은 <봄처녀>, <개나리>, <병아리>, <고향의 봄>, <봉선화>, <낮에 나온 반달>, <성불사의 밤>, <퐁당퐁당> 등 상당히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친일 행각을 했다는 이유로, 홍난파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딜쿠샤
딜쿠샤는 3.1운동을 최초로 해외에 알린 앨버트 테일러가 거주했던 곳이다. '딜쿠샤'의 뜻이 궁금해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는데, 힌두어로 '꿈의 궁전', '이상향' 이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라는 설명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는 잘못된 정보였다. 현장에서 확인해 보니, '딜쿠샤'는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이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였다.


























외국인 앨버트 테일러와 메리가 한국과 맺은 인연은 각별해 보였다. 그들의 사랑은 낭만적인 데가 있었고, 3.1운동을 최초로 해외에 알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들은 한국 역사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