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놀부 보쌈'은 있는데 '흥부 보쌈'은 없는 걸까?
'놀부 보쌈'이나 '놀부 부대찌개' 상호는 있는데, '흥부 보쌈'이나 '흥부 부대찌개' 상호는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 판소리 <홍보가>에는 '흥부'와 '놀부'가 아니라 '흥보'와 ‘놀보’로 나온다. 밥보, 잠보, 울보 등의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보’는 어떠한 특성을 가진 사람을 나타내는 데 사용하는 접미사이다. 그러니까 '흥보'와 '놀보'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로, 착한 사람을 '흥보'라 하고 심술궂은 사람을 ‘놀보’로 지칭한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들 인물의 격을 높이기 위해 '흥부'와 '놀부'라고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성씨는 박(朴)씨라고도 하고 연(燕)씨라고도 하는데, 이는 박통 혹은 제비와 연관되어 붙여진 것이다.
흥보와 놀보에 대한 호불호는 시대에 따라 달라져 왔다. 전통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심성이 착한 흥보가 긍정적인 인물이며 욕심많고 인색한 놀보가 부정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1950년대 이후 전통적인 관념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놀보에게서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하려는 ‘놀보 예찬론’이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세태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심성이 착하지만 무능한 흥보보다는, 욕심 많고 인색하지만 근면함으로 부를 축적한 놀보야말로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인간상이라는 인식이 기저에 놓여 있는 것이다. ‘놀부 보쌈’이나 ‘놀부 부대찌개’ 등의 상호에서도 그 점이 잘 나타나 있다.
흥부를 내세우면 불쌍한 사람에게 값을 받지 못할 수도 있고 선행을 베풀다 보면 돈을 제대로 벌지 못할 것이기에, 인색하지만 부지런하고 부자인 놀부를 상호로 내세웠을 것이다.
'놀보'는 어떤 인물?
권선징악과 개과천선으로 끝나는 결말에서 알 수 있듯이, <흥보가>의 표면에 드러난 주제의식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편이다. <흥보가>는 교훈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해학적 표현이 풍부하여 재담의 성격이 강한 작품인데, 재담과 해학의 미학을 창출하는 중심 인물이 바로 놀보이다.
놀보는 심술 궂고 탐욕스러운 인물의 대명사이다. 심술 궂은 사람을 일컬을 때 쓰는 “놀보 심사”라고 하거나 “놀보의 환생이라”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이다. 보통 사람들은 오장이 육보인데, 놀보는 칠보이다. 밥만 먹으면 남한테 심술을 부리는 보 하나가 왼쪽갈비 속에 딱 붙어 있는 것이다. <흥보가>에는 놀보의 다양한 심술이 나열되어 있는데, 몇몇 예를 들어보자.
불 붙는 데 부채질, 호박에다 말뚝 박고, 길 가는 과객 양반 재울 듯이 붙들었다 해가 지면 내어 쫓고, 양반 보면 관을 찢고, 다 큰 큰애기 겁탈하고, 수절 과부는 모함하고, 우는 놈은 발가락 빨리고, 똥누는 놈은 주저앉히고, 소주병에 독약 넣고, 곱사등이는 뒤집어놓고, 봉사 눈에 똥칠하고, 애 밴 부인은 배를 차고,,,,
심술 일부만 소개했는데도 이 정도이다. 현실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보기 어렵지만, 사실적 표현과 과장적 표현 그리고 해학적 표현을 통해 놀보가 얼마나 고약한 인물인가를 강조한 것이다.
놀보는 흥보와 형제로, 운봉과 함양 두 어름에 살았다고 전해진다. 사설에 등장하는 이 구절과 해당 지역에서 전승되는 설화 등을 근거로, 남원에서는 운봉의 인월면 성산리와 아영면 성리를 흥보마을이라 하고 매년 축제 '흥부제'를 개최하고 있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놀보는 형이고 흥보는 아우이다. 놀보는 어느날 동생 흥보를 나가라고 내어 쫓는다. 말하자면 분가를 하라는 것인데, 문제는 놀보가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을 동생에게 나누어 주지 않고 독점하는 데 있다. 놀보가 흥보를 내쫓기 위해 내세운 명분이 없지는 없다. 장남으로서 부모 봉양하고 제사를 전담하는 등 고생했으니, 부모 재산은 자신이 차지하는 게 마땅하다는 것이다. 놀보가 흥보를 마구잡이로 내쫓은 것은 아니며, 나름대로 명분을 내세웠다.
(아니리) 네 이놈, 듣거라. 너와 나와 형제로되 부모 생전 계실 적에 등분(等分) 있이 지낸 것은 너도 응당 잘 알지? 우리 부모 야속하야 나는 집안 장손이라고 선영을 맽기면서 글 한자 안 가리키고, 주야(晝夜)로 일만 시켜 소 새끼 부려먹듯 부려먹고, 네 놈은 즉손(卽孫)이라고 특별히 사랑하야 주야로 글만 갈쳐 호의호식 하던 일을 내가 지금 생각하면 분하기 짝이 읎어. 그러니 네 놈은 부모 때 세도를 하였은즉, 나도 인제 내 마음대로 세도 좀 허여보자. 이 집안 살림살이, 논, 전답, 마구간, 내 손으로 장만해서 네 놈 좋은 일 못하겠어. 네 계집, 자식덜이 여태껏 먹은 것을 값을 쳐서 받지만은, 그는 응당 못할망정 더 보던 안 할테니, 너는 오늘 기집, 자식 데리고 떠나라.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재산을 상속할 때 자식들에게 균등하게 배분했으며, 딸 자식도 일정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들어와 ‘장자상속 우선의 원칙’이 적용되면서 장자가 상속권을 소유하는 방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놀보가 흥보에게 분가를 요구하며 나가라고 한 데는 이러한 조선 후기의 현실이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재산을 독식하고 경제적 자립능력이 없는 동생 흥보를 허허벌판으로 내쫓은 놀보의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절제를 모르는 탐욕스러움으로 인해 놀보는 결국 패가망신하게 되는데, 그 과정을 노래한 것이 바로 “놀보 박타는 대목”이다. 흥보처럼 부자가 되기 위해 놀보는 계속해서 박을 타지만, 그때마다 놀보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놀보의 상전, 상여, 초라니패 등 다양한 부류의 놀이패 등이 등장하여 놀보의 재물을 축내는 것이다. 마침내 놀보는 마지막 박에서 나온 장비에 의해 철저히 징치를 당하며 패가망신한다. 마음 착한 흥보가 형님 소식을 듣고 달려와 형제 우애를 되찾고 행복하게 잘살았다는 이야기로 결말을 맺지만 말이다.
놀보가 인색하고 욕심이 많아 부정적인 인물형임에는 틀림 없지만, 한편으로는 윤리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욕망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지닌 역동적 인물형의 모습도 지니고 있다. 어떻게 보면 놀보는 지극히 인간적인 결점 혹은 약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 내에서 놀보는 때로 웃음을 불러 일으키는 해학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흥보가>에 나오는 ‘화초장타령’과 ‘놀보, 제비 후리러 가는 대목’을 예로 들어 놀보의 됨됨이를 살펴 보자. 놀보는 동생 흥보가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흥보집에 찾아간다. 그곳에서 흥보의 부자 된 내력을 듣고 자신도 부자가 되어야 겠다는 욕심을 품은 채 은금보화가 가득 담긴 화초장을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 장면이 바로 '화초장 대목‘이다.
(중모리)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하나를 얻었다. 얻었네. 얻었네. 화초장 하나를 얻었네. 또랑을 건너뛰다, 아차, 내가 잊었다 초장, 초장. 아니다. 방장, 천장. 아니다. 고초장, 된장. 아니다. 송장, 구들장. 아니다. 이놈이 거꾸로 붙이면서도 모르것다. 장화초. 초장화. 아이구, 이것 무엇이냐 갑갑하여서 내가 못 살겄다. 아이고, 이거 무엇이냐 저의 집으로 들어가며, 여보 마누라 집안 어른이 어디 갔다가 집안이라고서 들어오면, 우루루루 쫓아나와서 영접허는 게 도리가 옳지. 계집이 이 사람아 당돌히 앉어서 좌이부동(坐而不動)이 웬 일인가? 에라 이 사람 몹쓸 사람. 놀보 마누라 나온다. 놀보 마누라가 나와. 영감 오신 줄 내 몰랐소. 영감 오신 줄 내가 몰랐소. 이리 오시오. 이리 와.
화초장이라는 이름을 기억해 내기 위해 애쓰는 놀보의 모습에서 악인형의 면모는 찾아 볼 수 없다. 엉뚱하게 된장, 송장, 구들장 등의 이름을 들먹이면서도 끝까지 안간힘을 쓰는 놀보에게서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웃음을 유발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흥보처럼 제비 박씨를 얻어 부자가 되기 위해 제비를 몰러 나다니는 <제비 후리러 가는 대목>에서도 세속적 욕망이 가득한 놀보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잘 드러난다 .
(중중모리) 제비 몰러 나간다 제비 몰러 나간다. 이 때 춘절(春節) 생각하니 하사월(夏四月) 초파일, 연자(燕子),나비는 훨훨훨, 수양버들에 앉은 꾀꼬리, 제비인가 의심하고, 남비오작(南飛烏鵲)의 까치만 보아도 제비인가 의심하고, 층암절벽에 비둘기 보아도 제비인가 의심하고, 연비여천(鳶飛戾天) 소리개만 보아도 제비인가 의심하고, 떴다 저 제비야. 이편은 우두봉, 저편은 좌두봉, 건넌봉, 맞은봉, 망단산으로 올라가 검불을 툭 차, 후여 허허허 처 날려보고, “떴다 저 제비야, 네가 어디로 향하느냐. 그 집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 집은 천화일(天火日)에 지은 집이라 화급(火及)이 동량하니, 좋은 내 집으로 들어와 보물 박씨를 물어다가, 천하부자를 되게 하려무나. 어으에으어 허, 내 제비야.
오래 전에 박동진 명창이 어떤 광고에서 “제비 몰러 나간다~”를 불러 큰 인기를 얻은 적이 있는데, 여기서 불렀던 소리가 바로 이 대목이다.
놀보가 지니고 있는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오늘날에는 근면함으로 부를 축적한 근대적 인간형 혹은 자본주의적 인간형으로 재평가하는 시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런 시각은 특히 20세기 이후 더욱 확산되었는데, 놀보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이나 연극 그리고 마당놀이 작품이 꾸준히 이어져 온 현상이 그 점을 잘 보여준다. 채만식의 <태평천하>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놀보와 닮아있거니와, 1966년 최인훈은 <놀부뎐>을 출간했다. 김기팔의 <놀부전>(1970), 최인훈 소설을 각색하여 무대에 올린 김영렬 연출의 <놀부전>(1972)과 허규 연출의 <놀부뎐>(1973,1977,1979), MBC창사 22주년 기념 마당놀이로 공연된 <놀부전>(1983) 등은 현대의 관점에서 놀보를 새롭게 조명하여 작품화한 대표적인 예이다.
그렇지만 자본이 지배하는 시대, 욕망이 극대화되고 끝없이 팽창하는 이 시대에, 과연 우리에게 행복은 무엇이며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바람직한 인간상은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놀보는 이런 물음에 대한 반성적인 사유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놀보 예찬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