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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편제>와 한국 문화

간다르바 2021. 9. 7.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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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편제>는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와 <소리의 빛>을 원작으로 삼아, 1993년에 상영된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상영관에서 관람한 이후 지금까지 이 영화를 스무 번 이상 보았다. 그리고 볼 때마다 참 잘 만든 영화라는 생각을 했다. 빼어난 영상미와 군더더기 없는 스토리 전개 그리고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송화 역의 오정해도 매력적이었지만,  특히 유봉 역을 담당한 김명곤의 연기는 압권이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100만명 이상의 관객이 관람하여 흥행에 성공했으며, 이 영화를 계기로 판소리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이전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지게 되었다. 당시 10여세를 전후한 학생들 가운데 판소리를 배워 전문적인 소리꾼의 길로 들어선 사례가 많았는데, 현재 30대 중후반에 해당하는 이들 소리꾼들을 이른바 ‘서편제 키즈’라고 부른다.

 

영화 <서편제>가 세상에 나온 지 20년 이상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여전히 그 자체로 감동적인 데가 있으면서  한국문화, 특히 소리문화를 이해하는 유용한 텍스트이기도 하다. 이 시점에서 새삼 영화 <서편제>를 소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화 <서편제> 포스터(출처 : 네이버 이미지) 

 

 

 

영화의 시대 배경

 

영화 <서편제>의 시대 배경은 해방을 전후한 시기인데, 이 시기 판소리 전승환경의 특징이 매우 적실하게 묘사되고 있다. 판소리의 주요 공연 공간으로 대갓집, 요정, 계모임, 장터 약장수판 등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당대의 시대적 상황에 정확히 조응되는 것이다. 판소리가 전통예술로서의 위상을 지니게 되는 상황에서 서양에서 유입된 양악 뿐만 아니라 대중극의 성격이 강한 창극이나 악극 등에 밀리는 양상을 보이는 것 또한 이 시기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영화에서, 화가로 전향한 친구 낙산이 유봉에게 왜정 때는 엔까가 판을 치더니 해방되고 나니까 양놈들 노래 소리가 판을 치니 한물 간 소리 배워봤자 앞길이 막막할거야. 나한테 그림이나 배우면 굶는 건 면할꺼다.”라고 말한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판소리를 한물 간 소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꼬장꼬장한 성격에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유봉역의 김명곤(출처 : 네이버 이미지) 

 

판소리가 극적 양식을 지향하며 파생된 갈래가 바로 창극이다. 창극은 태생적으로 판소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면서도 두 양식은 변별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창극에서 부르는 소리를 판소리와 구별하여 이른바 창극소리혹은 연극소리라고 지칭한다. 판소리와 창극소리는 목을 쓰는 법이나 판을 이끌어 가는 방식 그리고 사설의 측면 등에서 변별된다. 판소리는 성음을 중시하는 데 비해, 창극소리는 성음보다는 극적인 요소를 강조한다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 차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판소리에 비해 공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창극소리를 폄하하는 의식이 엄존하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에서 유봉이 창극 단체에 들어가지 않고 소리꾼의 길을 고집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점과 관련이 있다. 유봉은 동호와 갈등하는 상황에서, ‘쌀이 나오고 밥이 나와야만 소리하느냐고 하면서 소리에 미쳐 득음하게 되면 부귀공명보다 좋고 황금보다 좋은 것이 소리라고 말하는 데서 판소리에 대한 유봉의 무한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유봉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피할 수 없어 궁핍한 삶을 영위한다. 이와 반대로, 같은 문하에서 소리 공부한 송도상은 창극배우로 인기를 얻으며 활동한다.

영화 <서편제>에 나오는 창극의 주인공 송도상(출처 : 네이버 이미지)

 

판소리에 비해 창극소리를 폄하하는 인식은 유봉에게서 잘 나타난다. 창극 <대춘향전> 공연이 끝난 후 같은 문하에서 공부했던 이도령 역의 송도상 일행과 술자리를 갖던 도중 유봉은 한 친구에게 그것도 소리라고 무대 위에서 팔아먹고 다니냐면서 성질을 낸다. 이는 유봉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떠돌이 소리꾼으로서의 콤플렉스가 발동한 탓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무대소리인 창극소리에 대한 못마땅함이 강했기 때문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소리' 갈래

 

한국의 가창예술에는 범패, 가곡, 가사, 민요(향토민요, 통속민요, 신민요 등으로 세분된다), 잡가, 판소리, 단가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양반 사대부층이 향유했던 가곡이나 가사는 노래’()라고 하고, 민속예술의 영역에 해당하는 민요, 잡가, 판소리, 단가 등을 소리’()라고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인 용례이다.

 

영화에는 민요, 판소리, 단가 등이 등장한다. 유봉과 송화 그리고 동호가 함께 길을 떠나다가 <진도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이 있다. <진도아리랑>은 전라도 지역의 전통민요인 <산아지타령> 등에 기반하여 20세기에 새롭게 정립된 작품으로, 근대민요의 성격이 강하다

 

<진도 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출처 : 네이버 이미지)

 

영화 <서편제>에 등장하는 <진도아리랑> 장면은 몇 가지 점에서 한국 소리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첫째, 처음에는 느린 가락으로 부르다가 중간에 빠른 가락으로 부른다는 점이다. 느리게 부르다가 빠르게 부르는 방식은 한국 소리문화의 일반적 특징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긴방아타령>을 부른 후 <자진방아타령>을 부르는데, 여기서 ~ ’으로 명명된 소리는 느린 가락이며, ‘자진~’으로 명명된 소리는 빠른 가락이다. 둘째, 관용적 사설도 있지만, 대부분 상황성과 즉흥성에 입각한 사설로 소리한다는 점이다. 영화에 나오는 사설은 다음과 같다.

 

(느리게)

사람이 살며는 몇백년 사나 개똥같은 세상이나마 둥글둥글 사세

문경새재는 웬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 난다

소리 따라 흐르는 떠돌이 인생 겹겹이 쌓인 한을 풀어나 보세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이내 가슴 속엔 수심도 많다

가버렸네 정들었던 내 사랑 기러기떼 따라서 아주 가버렸네

저기 가는저 기럭아 말 물어 보자 우리네 갈길이 어드메뇨

(빠르게)

금자동이냐 은자동이냐 둥둥둥 내딸 부지런히 소리 배워 명창이 되거라

아우님 북가락에 흥을 실어 멀고 먼 소리길을 따러 갈라요

노다 가세 노다 가세 저 달이 떳다 지도록 노다나 가세

춥냐 덥냐 내 품안으로 들어라 베개가 높거든 내 팔을 베어라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서 지느냐 날 두고 가는 님은 가고 싶어서 가느냐

만경창파에 둥둥둥 뜬 배 어기여차 어기야디어라 노를 저어라

 

세 사람이 돌아가면서 사설을 주고 받는데, 각 인물은 각자의 생각을 담아 사설을 엮어가고 있다. 유봉은 자신의 신세를 애절하게 노래하다가 송화가 명창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송화 또한 고수인 동생과 함께 소리꾼의 길을 가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즉흥적으로 사설을 엮고 있다. 이렇듯 상황성과 즉흥성 그리고 현장성을 발휘하는 것은 민요의 본질적 특징이기도 하다. 느린 가락은 한의 정서라 할 수 있는 애절함과 맞닿아 있지만, 빠른 가락은 신명을 자아낸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에는 단가도 등장한다. 단가는 판소리 공연에 앞서 부르는 비교적 짤막한 길이의 소리로, '허두가'라고도 한다. 소리꾼이 목을 풀기 위해 부르는데, 청중의 수준을 가늠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단가는 대부분 자연 풍광 예찬, 국왕의 만수무강 기원, 인생무상 등을 다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비교적 오래된 단가로, <진국명산>, <만고강산>, <강상풍월> 등이 있는데, <사철가(이산저산)>는 영화 <서편제>에서 불리면서 대중들에게 잘 알려졌다. 그 사설은 이러하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어 왔건만은 세상사 쓸쓸허구나.

나도 어제는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다.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데가 있나.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니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 승화시라. 옛부터 일러 있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된들 또한 경개 없을소냐.

한로상풍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히지 않는 황국단풍은 어떠허며,

가을이 가고 겨울이 되면 낙목한천 찬바람에 백설이 펄~펄 휘날리어

월백(月白) 설백(雪白) 천지백(天地白)허니 모두 다 백발의 벗이로구나.

봄은 갔다가 해마다 오건만, 이내 청춘은 한번 가서 다시 올 줄을 모르네그려.

어화 세상 벗님네야

인생이 비록 백년을 산대도 잠든 날과 병든 날과 걱정 근심 다 제허면

단 사십도 못살 우리 인생인줄 짐작하시는 이가 몇몇인고

 

보통 단가는 기교를 많이 사용하지 않고 담백하게 부르는데, <사철가>는 중년에 나온 작품으로 기교적인 목구성을 사용하면서 비교적 화려하게 부르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일반적으로 많이 불리는 <사철가>의 사설과 구별되는 점이 있지만, 영화에서 이 소리가 불린 이후 <사철가>는 가장 인기 있고 많이 불리는 단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판소리를 주제로 한 영화인 만큼 <서편제>에는 여러 번에 걸쳐 소리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춘향가> 갈까부다’, ‘사랑가’, ‘이별가’, ‘옥중가’, ‘암행어사 출두’, <흥보가> 돈타령’, <심청가> 심청 밥 빌러 나가는 대목’, ‘심청 인당수 빠지는 대목’, ‘심봉사 눈뜨는 대목등이 그 예이다. 그런데 공연 형식의 측면에서 보면 이는 모두 토막소리에 해당한다. 토막소리는 말 그대로 판소리 전체가 아니라 특정 대목만을 부르는 것을 가리킨다. 전통사회에 있어서 판소리의 일반적인 연창(演唱) 방식은 토막소리’(부분창)였다. 다시 말하면 명창마다 특장이 있어서 이를 그 명창의 더늠이라고 했으며, 더늠 중심의 공연이 주를 이루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는 완창의 방식은 1968년 박동진의 <흥보가> 완창 공연 이후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기가 해방을 전후한 때이니만큼 토막소리 중심으로 소리한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배우 오정해(출처 : 네이버 이미지)   

 

개인적으로 배우 오정해를 잘 아는 편이다. 오정해는 미스 춘향 출신으로, 본래 판소리를 전공한 실기인이다. 사석에서 본 오정해는 소탈하고 진솔한 스타일이다. 영화 <서편제>에 출연하여 일약 스타가 된 이후, 소리꾼으로서 보다는 동아방송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엔터테이너로서의 재능을 더 잘 발휘하며 활동하고 있다. 전에 오정해가 진행하는 KBS FM 국악프로그램에 1년여 간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단아하고 정갈하게 진행하며 적재적소에 맞는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배우가 아니라 소리꾼의 길을 걸었더라면 , 오정해는 우뚝한 명창이 되어 멋진 소리를 들려주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면의 미학

 

이면이란 사설의 내용을 음악적으로 어떻게 표현해 내는가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단순히 사실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이면이다라고만 해서는 이면의 의미를 충분하게 드러낼 수 없다. 무엇이 사실적인가 하는 문제는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서편제>에는 이면의 미학을 설명하는 내용이 많이 나오는데, 주로 유봉이 송화와 동호를 가르치는 장면에서 제시된다. 몇몇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영화를 워낙 많이 보다보니 세세한 내용까지 파악하게 되었고, 나름 공들여 정리한 것이다.) 

 

- 귀곡성을 가르치는 장면에서 유봉은 통성을 쓰지 말고 머리하고 코를 울려서 가성으로 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송흥록 명창과 관련된 일화를 들려준다.

 

-옥중가를 가르치는 장면에서, 유봉은 상청을 낼 때에는 창으로 찌르듯이 무섭게 소리해야 하며, 힘없이 하면 넋두리 <흥타령>이 되고 말뿐이라고 강조한다.

 

- 송화가 눈이 벌기 시작하면서 <심청가>를 배우고 싶다면서 ‘심청 밥 빌러 나가는 대목’ 을 하는데, 이에 대해 유봉은 밋밋하게 소리하면 안된다고 하면서 심청이 된 기분으로 애절하고 슬프게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 닭을 훔쳐 송화에게 요리해 주는데, 닭주인이 나타나 유봉을 사정없이 때린다. 그런데 정작 유봉은 송화에게 “어따 그놈의 자식, 그 목청 한번 좋다. 너 들었지? 그 심봉사가 선인들한테 화를 내는 성음은 저렇게 나와야 하는 것이여.”라고 하면서, 이면에 맞게 소리해야 하는 점을 가르치고 있다.

 

-동호에게 고법을 가르치는 장면에서, 북은 밀고 달고 맺고 푸는 길이 있는데, 이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순환과 조응되는 이치라고 설명한다. 고수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가 추임새를 넣는 일인데, 추임새에도 이면이 있음을 설명한다. “추임새를 할 적에도 말이여, 소리가 나가다가 숨이 딸려가지고 소리가 처진다 싶으면 얼씨구 하고 이렇게 추어서 부추켜 줘야 할거 아니야. 그리고 소리가 슬프게 나갈 때는 북 가락도 줄이고 추임새도 이렇게 슬프게 해주고 소리가 씩씩할 때는 북소리도 크게, 추임새도 씩씩하게, 아 이렇게 해야 될 것 아니여, 이놈아. <춘향가>에 장단이 천개가 있다면 이 천개를 수천번 수만번 쳐가지고 이 장판지에 들기름이 쩔 듯이 그냥 네 몸뚱이 속에 북가락이 꽉 쩔어있어야 된단 말이여.”라는 말에서 그 점이 잘 드러난다.

 

판소리는 한마디로 말한다면 사람을 울리고 웃기는 예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슬픔은 슬프게 기쁨은 기쁘게 표현해야 하는데, 이는 곧 사설의 내용을 음악적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와 관련된 문제이다. 판소리는 통성으로 소리해야 한다고 하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가성을 사용하는 것이 허용된다. 유봉은 송화에게 판소리를 가르치면서 판소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면의 미학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는 고법에도 적용되고 있다.

 

 

한의 소리 그리고 한을 넘어선 소리

 

영화 <서편제>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 설정은, 한을 심어 주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아버지 유봉이 의붓딸 송화의 눈을 멀게 한다는 내용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 설정은 그 비현실성만 문제 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이 영화는 판소리는 한의 소리라는 주제의식을 구현한 작품이라는 인식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영화 제목을 <서편제>라고 한 일차적 이유는 물론 이청준의 원작 소설에 기반한 데 있다. 소설 <서편제>는 떠돌이 생활을 하던 소리꾼과 그의 딸에 관한 이야기를 액자구성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는데, 송화가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이유는 선천적인 장애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목청도 목청이지만, 좋은 소리를 가꾸자면 소리를 지니는 사람 가슴에다 말 못할 한을 심어 줘야 한다던가요?”

“그래서 그 한을 심어 주려고 아비가 자식 눈을 빼앗았단 말인가?”

“사람들 얘기들이 그랬었다오.”

“아니지..... 아닐걸세.”

사내가 다시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사람의 한이라는 것이 그렇게 심어주려 해서 심어 줄 수 있는 것은 아닌걸세. 사람의 한이라는 건 그런 식으로 누구한테 받아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살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긴긴 세월동안 먼지처럼 쌓여 생기는 것이라네. 어떤 사람들한텐 사는 것이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것이 사는 것이 되듯이 말이네.... 그 보다도 고인한테 좀 미안한 말이지만, 노인은 아마 그 여자의 소리보다 자식년이 당신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해두고 싶은 생각이 앞섰을지도 모르는 일일 거네.”

 

소설에서는 전언(傳言)의 방식으로 아버지가 한을 심어 주기 위해 딸의 눈을 멀게 했다고 하면서도, 어쩌면 딸을 곁에 두고 싶은 욕망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추론을 덧붙이고 있다. 아버지가 딸의 눈을 멀게 했다는 설정은 다분히 소설적 상상력의 산물로 보는 편이 온당하다. 그리고 영화 <서편제>는 이러한 소설적 상상력에 기반하여 서사를 전개하며 한()을 한국의 보편적인 미학으로 설정하고, 이를 그림같이 아름다우면서도 처연한 영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유봉이 송화에게 서편제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서편소리는 말이다. 사람의 가슴을 칼로 저미는 것처럼 한이 사무쳐야 되는데 네 소리는 이쁘기만 하지 한이 없어. 사람의 한이라는 것은 한평생 살아가면서 이 가슴속에 첩첩이 쌓여서 응어리지는 것이다. 살아가는 일이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일이 살아가는 일이 된단 말여.”

 

영화 <서편제>에서 '한'을 절대미학으로 규정하고 판소리를 '한'의 예술로 그려낸 것은 비판 받을 소지가 없지 않다. 우리에게는 신명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과 더불어 신명이 한국적인 미학의 본령을 이루는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봉이 건강이 쇠약해지면서 송화에게 이제부터는 니 속에 응어리진 한에 파묻히지 말고 그 한을 넘어서는 소리를 혀라.”고 하면서, “동편제는 무겁고 맺음새가 분명하다면 서편제는 애절하고 정한이 많다고 허지. 하지만 한을 넘어서게 되면 동편제도 서편제도 없고 득음의 경지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명창이 갖추어야 할 조건이 여러 가지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으뜸은 득음(得音)일 것이다. 득음이란 상,, 하청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인간의 희로애락 나아가 자연의 소리 혹은 귀신의 소리까지도 근사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영화 <서편제>에서 궁극적으로 강조한 것은 '득음'이며, 이는 한을 넘어선 소리와 상통하는 말이기도 하다.

 

 

영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송화가 동호를 만나 부른 <심청가>중 ‘심청 인당수 빠지는 대목’과 ‘심봉사 눈뜨는 대목’은 안숙선 명창의 소리이며,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구음은 김소희 명창의 소리이다. 송화가 한을 넘어선 소리, 즉 득음의 경지에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주기 위해 안숙선 명창과 김소희 명창의 소리로 대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