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op의 세계
K Pop의 전사(前史)
K Pop의 전사로서 주목해야 할 대상은 대중가요이다. 물론 대중가요가 등장하기 이전에 전통사회에서 향유되었던 가창예술로 민요나 잡가가 있지만, 20세기 이후 서구와 일본의 영향 아래 성립되고 전개된 대중가요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K Pop의 위상을 찾을 수 있다. 최초의 대중가요로 윤심덕의 <사의 찬미>를 들 수 있는데, 이 노래는 외국곡 <도나우강의 물결>을 번안한 작품이다. 대중가요는 일본 엔카의 영향 아래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엔카는 서양음악의 영향으로 4박자로 된 트로트풍의 멜로디다 특징이다. 이러한 엔카의 영향으로 한국 대중가요에서 트로트 계열의 노래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대표적인 대중가요로, <타향살이>(고복수), <목포의 눈물>(이난영), <눈물젖은 두만강>(김정구), <황성옛터>(이애리수), <나그네 설움>(백년설), <홍도야 울지마라>(김영춘) 등을 꼽을 수 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한 이후 대중가요는 해방, 분단, 전쟁, 피난, 이산의 아픔을 담은 가사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악극단과 가극단 등의 공연의 일부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 뒤 이어 6. 25 전쟁을 겪게 되면서 전쟁으로 인안 이별의 아픔과 슬픔 등을 담은 노래가 많이 불렸다. <가거라 삼팔선>(남인수), <이별의 부산 정거장>(남인수), <단장의 미아리 고개>(이해연), <봄날은 간다>(백설희), <신라의 달밤>(현인), <비 내리는 고모령>(현인), <귀국선>(이인권), <울고 넘는 박달재>(박재홍), <울어라 은방울>(장세정), <님 계신 전선>(금사향), 등이 이 시기 대표적인 대중가요이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주한미군 부대 무대를 통해 활동하던 가수들이 새로운 감각과 형식을 수용하면서 한과 애수를 뛰어넘는 새로운 작품들을 대거 선보였다. 현미, 최희준, 이금희, 김상희, 신중현 등이 그 대표적인 가수들이다. 특히 1965년 <서울 푸레이보이>로 데뷔한 남진과 1966년 <천리길>로 데뷔한 나훈아는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남진은 1972년 <님과 함께>로 크게 인기를 얻었으며 1982년 <빈잔>을 부르며 활동을 지속했다. 나훈아는 <갈무리>, <영영>, <잡초>, <무시로>, <때벌> 등 많은 곡을 히트시키며 활동했다. 그리고 대중가요는 tv드라마나 영화 주제곡으로 불리던 곡이 인기를 얻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전 시기에 비해 독자적 가창갈래로서의 위상과 격이 높아지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노래로, <비 내리는 호남선>(손인호), <오부자 노래>(도미), <나 하나의 사랑>(송민도), <빨간 마후라>(자니브라더스), <맨발의 청춘>(최희준), <사랑이 메아리 칠 때>(안다성), <동백 아가씨>(이미자) 등을 꼽을 수 있다. 해외의 명곡들이 번안곡으로 불리는 사례가 많아진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이다. 해외 가요제 가운데 ‘산레모 가요제’는 ‘볼라레’ ‘마음은 집시’ ‘노노레타’ ‘케사라’ 같은 명곡들이 발표된 경연의 장이었으며, 유럽 최대 가요제인 ‘유러비전 송 콘테스트’는 스웨덴의 아바를 배출했다. 그리고 이러한 가요제에서 인기를 얻은 곡은 곧 바로 한국에 수용되어 이용복이나 조영남 그리고 조용필 등이 번안곡으로 불렀던 것이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 대중가요는 이전 시기와 질적으로 구별되는 전성시대를 맞이했다. 이 시기는 통기타와 청바지로 상징되는 청년문화가 빛을 발했다.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김추자)가 인기를 얻었으며, 인기 있는 가수의 팬클럽이 활성화 된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인바, 이미자, 문주란, 이봉조, 정훈희, 패티김, 혜은이, 윤형주, 송창식, 김민기, 양희은 등이 그 대표적인 가수들이다. 무엇보다도 가왕(歌王)으로 칭송받으며 오늘날까지 빼어난 활약상을 보이고 있는 조용필의 등장은 한국 대중가요를 더욱 풍성하고 질적으로 한 단계 상승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조용필은 모던록, 스탠더드 팝, 트로트 등 다양한 양식에 두루 능했으며, 당대의 새로운 음악을 선보이며 대중음악의 중심에 우뚝 섰다. 19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히트시킨 조용필은 대마초 파동으로 잠시 활동이 중단되기도 했지만, <단발머리>, <창밖의 여자> 등 수없이 많은 인기곡을 선보이며 현재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1970년대 후반 등장하여 이후 한국 대중가요사에서 큰 의미를 지니게 된 가요제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요제를 통해 다양한 장르의 가요와 역량 있는 가수들이 많이 배출되었던 것이다. 1975년 정훈희가 칠레국제가요제에서 ‘무인도’로 3관왕에 오르고 해외 가요제가 인기를 이어가자, MBC는 1977년 한국 최초 창작곡 경연대회인 ‘서울가요제’를 개최했다. 이 대회는 나중에 ‘서울국제가요제’로 이름을 바꾸어 규모를 키웠다. MBC는 같은 해 대학가요제를 개최했는바, 이 가요제는 많은 후속 가요제를 낳으며 수십 년간 한국의 대중음악을 이끈 원동력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당시 대학가요제를 개최한 이유는 ‘명랑한 대학 풍토 조성과 건전 가요 발굴.’이었는데, 방송사가 대학생들의 창작곡으로 가요제를 개최했다는 사실은 트로트 중심의 성인 가요와 함께 젊은이들의 포크와 락 음악이 대중음악의 중심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제1회 대학가요제에서는 서울, 전남, 제주 등 각 지구 대표가 뜨거운 경합을 펼친 끝에 ‘나 어떡해’를 부른 서울대 농대 그룹사운드 샌드페블스가 그랑프리를 받았다. 동상을 받은 서울대 트리오의 ‘젊은 연인들’ 역시 끊임없이 대중의 사랑을 받는 명곡이 되었다. 대학가요제는 2012년까지 지속되며 한국 대중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젊은 아마추어 음악인의 풋풋함, 신선함, 순수함 그리고 패기와 열정은 훈련으로 능숙해진 프로의 음악에서는 찾을 수 없는 매력으로 대중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그 때 그 사람>(심수봉), <돌고 돌아가는 길>(노사연), <내가>(김학래, 임철우), <꿈의 대화>(이범용, 한명훈), <참새와 허수아비>(조정희), <바다에 누워>(높은 음자리),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유열), <난 아직도 널>(작품하나) 등 이 가요제를 통해 배출된 인기곡은 상당히 많다. 그리고 배철수, 임백천, 심수봉, 벗님들, 노사연, 주병진(개그맨), 김학래, 조하문, 우순실, 김장수, 조갑경, 원미연, 유열, 이정석, 이규석, 이재성, 이무송, 장철웅, 김성호, 신해철, 전유나, 주병선, 김경호, 김동률, 이한철 등 많은 가수들이 대학가요제를 통해 인기 가수로 거듭 났다.
MBC 주최 대학가요제의 성공에 자극 받은 TBC는 1978년 7월, 연포해수욕장에서 ‘제1회 해변가요제’를 개최했다. 후발 주자였지만 히트곡 수로는 해변가요제가 대학가요제보다 많았다 특히 밴드들이 대거 등장해 ‘캠퍼스 그룹사운드’ 전성시대를 예고했다. 한양대 혼성 보컬 그룹 징검다리의 <여름>이 대상, 홍익대 밴드 블랙 테트라의 <구름과 나>가 우수상, 항공대 밴드 런웨이의 <세상모르고 살았노라>가 동상, 장남들의 <바람과 구름>이 장려상, 휘버스의 <그대로 그렇게>가 인기상을 받았다. 모두 아직까지 ‘7080 세대’의 사랑을 받는 곡들이다. 하지만 바닷가에서 가요제를 여는 것은 무리가 있어 해변 가요제는 ‘젊은이의 가요제’로 이름을 바꿨다.
나중에 ‘강변가요제’가 된 MBC FM의 ‘강변축제’는 해변가요제를 대신해 야외 여름 가요제의 상징이 되었다. 1979년 청평 유원지에서 처음 개최된 이 가요제는 여름, 야외, 청춘, 음악이라는 요소가 맞아떨어지면서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았고, 22회 대회까지 이어지며 많은 신인 가수들을 배출했다. 1984년 제5회 강변가요제에서 <J에게>로 대상을 탄 이선희가 대표적인 경우다. 건아들, 홍삼트리오, 주현미, 박미경, 유미리, 송시현, 이상은, 이상우, 박선주, 이재영, 진시몬, 육각수, 유리(‘쿨’ 멤버), 신연아(‘빅마마’ 멤버), 이영현(‘빅마마’ 멤버), 김현성, 박혜경, 장윤정 등이 강변가요제가 배출한 대표적인 가수들이다.
잔잔하고 서정적인 노래의 흐름을 대표하는 포크가 1980년대에 들어서서 주류로 밀려나면서, 약간의 과도기를 거치며 1980년대 후반에 서정적인 노래의 주류로 새롭게 정착한 양식이 바로 발라드이다. 1980년대 초 이용, 최성수 등에서 그 단초적 모습을 보인 발라드는, 1986년 즈음 이문세, 이광조, 유재하, 김종찬 등의 서정적이며 화려한 노래로 그 형태를 정돈해 갔다. 그리고 1988년 변진섭의 <홀로 된다는 것>이 엄청난 인기를 모으며, 1980년대 말 대중가요계의 흐름을 발라드로 바꾸어 놓았다. 이후 이상우의 <슬픈 그림 같은 사랑>(1988년), 윤상의 <이별의 그늘>(1990년), 신승훈 <보이지 않는 사랑>(1991년) 등, 1992년에 댄스뮤직이 주류 인기 경향을 바꾸어 놓기 전까지 최고의 인기 양식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또한 발라드는 1992년 이후 댄스뮤직의 시대가 열린 이후에도 계속 주류의 제2양식의 위치를 고수하여, 2010년대인 지금까지도 댄스뮤직과 발라드라는 양대 양식의 구도의 한 축을 유지하고 있다.
발라드는, 팝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포크와 록 등 다양한 음악적 성과를 흡수해 성립되었다고 보인다. 피아노가 중심이 되어 화성을 화려하고 굳건하게 유지하면서, 현악기로 애절함을 더한 발라드는, 이전의 어떤 양식보다도 넓은 음폭의 화려한 선율과 화성, 충만한 사운드를 구사했다. 포크가 지닌 서정성과 화성적 세련됨을 계승하되 포크보다 더 화려한 음악, 덜 이성적이고 더 강렬한 페이소스를 노출하는 노래, 록이 보여준 강렬함은 유지하되 좀 더 섬세하고 서정적 내면을 표현하는 노래에 대한 대중의 요구를 정확하게 반영한 양식이었다. 특히 1980년대 초중반 조용필 등의 노래가 만들어놓은 진지한 비극성에, 좀 더 현대적인 느낌의 복잡한 내면 묘사가 이루어지면서, 화려하고 복잡한 선율과 화성이라는 음악적 표현과 잘 결합했다. 이는 좀 더 국제적 수준의 세련된 현대성에 목말라하던 젊은 대중들의 요구와 접목한 것이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자가용이 보편화 되면서 휴대용 카세트 테이프가 대량으로 유통되면서 특히 가요 메들리가 크게 유행했는데,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보면서 인기를 얻었던 가수가 바로 주현미, 문희옥, 김연숙 등이다. 특히 주현미는 <비 내리는 영동교>, <눈물의 부르스> 등 다수의 히트곡을 불렀다. 메들리곡은 대부분 트로트 계열로, 슬픔이나 어두움의 정서가 아니라 밝고 명랑한 분위기의 노래라는 점이 특징이다. 심수봉은 1988년 트로트의 색채를 강하게 지닌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로 크게 히트했다.
1980년대 중반을 지나 발라드가 주류로 성장하는 시기에, 이와 동반하여 댄스뮤직이 본격화된 현상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몸의 시각적 현현이 중시되는 댄스뮤직 양식의 특성에 따라 관능적인 춤과 정확하고 빠른 리듬, 여기에 감정을 가볍게 처리하는 전자악기의 경쾌한 사운드가 결합한 것이 이 시기 댄스뮤직의 특징이다. 나미, 김완선, 박남정, 소방차 등으로 이어진 댄스뮤직은, 1990년대의 댄스뮤직과 직접적인 계승관계를 갖지는 않았지만, 이후 댄스뮤직과 발라드라는 주류 양식의 구도를 처음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1990년대에 들어와 조용필의 활동은 여전히 빛났으며, 신승훈, 김건모, 김종서, 이승철, 들국화, 이문세, 변진섭, 이선희, 조덕배, 김광석, 이은미, 박진영, 룰라, 클론 등의 활약상도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새로운 선두주자로 부각한 가수가 바로 서태지이다. 서태지는 이른바 문화대통령으로 불릴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으며, 특히 젊은이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서태지는 오늘날 K Pop의 태동을 예감하게 해 준 선구자격의 가수이기도 하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로 데뷔한 서태지는 랩과 힙합 그리고 댄스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작품을 선보이며 대중가요계를 평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의 대표적인 히트곡으로 <난 알아요>, <하여가>, <환상속의 그대>, <발해를 꿈꾸며>, <come back home>, <시대 유감> 등을 꼽을 수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6년 해체를 선언하면서 활동을 중단했지만, 동시대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저항의 메시지와 그들만의 색깔이 강하게 투사된 개성적인 음악의 영향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이들은 엄청난 팬클럽의 성원을 받으며 이른바 아이돌 스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는바, 이러한 면뿐만 아니라 음악적 측면에서 서태지는 오늘날 K Pop의 직접적 효시로 평가할 만하다. 이어 등장한 H.O.T, GOD, 젝스키스, 신화, 쿨 등은 가창력뿐만 아니라 댄스 실력을 겸비한 가수들로, 아이돌 스타로 자리 잡으며 K Pop의 태동을 예비해 주었다. 특히 젝스키스는 2010년 YG엔터테인먼트와 계약을 맺으며 인기 가수로 거듭 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K Pop의 개념
한류 3.0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한류 문화를 이끌고 있는 주된 영역은 1.0 시대의 K-drama와 2.0 시대의 K-Pop이다. 특히 K-Pop은 유튜브와 같은 인터넷 매체를 통해 시간적‧공간적 경계를 넘어 향유되고 있으며, 문화적으로 드라마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Pop은 서양 대중음악 전반을 지칭하나, 세계 대중음악을 가리키는 보편적인 용어로 그 의미가 확대되어 사용되고 있다. Pop에 접두어를 덧붙여 특정국가의 음악을 가리키는 선례는 다수 있다. Brit Pop, Swedish Pop, J Pop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K-pop은 기본적으로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개념화 된 용어라 할 수 있다. 1990년대 후반 일본에서 J-pop의 상대 개념으로 명명된 이후 두루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K Pop은 Pop에 한국을 의미하는 K가 결합된 것으로, 다른 국가 대중음악의 하위 장르가 아닌, 한국(Korea)이라는 국적성으로 차별화된 음악을 가리킨다. K Pop은 오늘날 ‘한류’의 대표적인 문화 현상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거의 보편화된 용어로 폭넓게 자리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K Pop이 가리키는 대상은 무엇이고 그 범주는 어떠한지 등에 대해서는 더 논의가 필요한 실정이다. K-pop에서의 ‘K’, 즉 Koreaness는 K-pop의 존립 기반임에도 불구하고 K-pop에 대한 정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는 동시대 문화현상이 지니고 있는 현재진행형으로서의 성격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강하다. 동시대 대중문화로서의 K-pop이 갖는 문화적 파급력이 워낙 강하다 보니, 이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례도 이전에 비해 상당히 많아졌다. 선행 연구에서 보이는 K-pop의 개념 규정이 다양하다는 사실이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몇몇 대표적인 사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한국 대중음악 전반을 가리키기보다는 해외에서 관심을 끌고 있는 한국 주류 대중음악의 최신 경향, 더 구체적으로는 아이돌 그룹의 팝을 지칭(김창남)
• 한국의 음악 산업을 통해 생산되고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권역에서 소비되는 대중음악 및 그와 연관된 문화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국제적 고유명사(신현준)
• 한국에서 생산되어 세계로 발신하는 한국의 대중음악(박애경)
• 글로벌 시장에서 대중적 인기가 있는 한국의 댄스음악(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음악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아이돌 가수, 그룹이 부르는 한국의 댄스음악(서민수 외)
• 1990년대 이후의 한국 대중음악 중 아이돌이 주축이 되어 생산된 서구 음악 장르, 특히 힙합, R&B, 록, 일렉트로닉 음악이 가미된 댄스음악(이수완)
• 1990년대 후반 이후 댄스음악 중심의 주류 장르(이상욱)
위의 내용을 보면, K-pop에 대한 개념 규정이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다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이라는 생산지역, ‘해외’라는 소비지역 그리고 ‘1990년대 이후’라는 시간적 범위가 그것이다. 물론, ‘대중성’이 강조되는 경우도 있지만, K-pop에서 ‘K’의 실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가 깊이 있게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생산지로서의 ‘K’, 서구음악 장르에 의해 형성된 ‘K’에 주목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해외로의 방향성과 1990년대 이후라는 시간적 범위에 주목하여 대중음악으로서의 K-Pop의 개념 문제를 논하는 시각이 지닌 일정한 유효함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각으로만 접근할 경우, 자칫 K는 정말 생산지에 머물 수밖에 없으며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무국적성’과 관련된 비판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는 곧 K의 실체는 없다는 주장으로 연결되고 나아가 한류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결국 K Pop에서의 ‘K’는 국가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장르 규정력을 지니고 있으나, 그 개념적 실체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K Pop은 국내가 아니라 해외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인데, 특히 중국에서 한국 대중가요를 소개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서울음악실’(1997년 시작)과 대형 콘서트 등을 통해 크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대중음악은 1세대 아이돌로 분류되는 H.O.T, NRG, S.E.S등이 주도했다. 2000년에 들어서면서, K-pop은 중국을 거점으로 하여 대만, 홍콩, 동남아시아 일부와 일본지역으로 확대까지 확대되면서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되는데, 2001년 아이돌 가수로 분류되는 최초 가수라 할 수 있는 보아가 일본에서 첫 싱글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보아를 비롯하여 일본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가수로, 동방신기, 류시원, K, 세븐 등을 꼽을 수 있다.
해외에서 사용되던 K Pop은 2000년대에 들어와 국내에서도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온라인의 확대와 전 세계를 잇는 동영상 공유 사이트들의 생성 등에 힘입어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K Pop은 아시아 권역을 넘어 중남미 등으로까지 전파되면서 전 세계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삼바, 탱고, 레게 등과 다르게 K Pop에는 특정 국가의 고유한 특질이 잘 드러나지 않으며, 영미 중심의 보편적인 글로벌 대중음악에 가깝다는 인식이 엄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K Pop이 지니고 있는 토착적, 지역적, 한국적 요소는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글로벌 / 로컬, 무국적 / 초국적 / 한국적 특질의 문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K Pop에는 글로벌적 요소가 상당히 많다. 이는 K-pop의 성립과 전개 과정을 고려해 볼 때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작품내적으로 볼 때, K-pop은 서양에 기반을 둔 음악 어법으로 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노래말이 반복적이고 따라 하기 쉽게 되어 있어서 국적을 불문하고 좋아할 수 있는 점, 경우에 따라사 해당 국가의 언어로 노래한다는 점 등 또한 글로벌적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공연 주체의 측면에서 가수 구성에 있어서의 다국적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태국이나 대만 등 주로 아시아권 가수들이 아이돌가수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이를 잘 보여준다.
K-pop에는 글로벌적 요소와 함께 한국적 요소도 많다. 무엇보다도 흥겨운 리듬과 소울이 느껴지는 노래라는 점이 그러하다. 이는 가무악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신명과 한의 DNA와 많이 닮아 있다. 아이돌 가수는 청중과의 끈끈한 공동체적 유대감과 공감력을 바탕으로 콘서트 분위기를 압도하며 팬클럽 문화를 만들어 나간다. 이는 광대와 청중의 교감 속에 판을 만들어 가던 전통적 공연방식과 상통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K-pop 노랫말에는 사회에 대한 풍자나 해학, 언어 유희 등의 요소도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전통예술의 재담에 보이는 풍자와 해학의 정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이처럼 K-pop에는 글로벌적 요소와 한국적 요소가 공존하고 있는데, 타자의 시선에 포착된 K Pop의 매력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꼽을 수 있다.
-창의성이 있다
-신곡이 빨리 나온다
-가창력이 있어서 노래를 잘한다
-아이돌 그룹이 예쁘고 잘생겼다
-음악과 춤이 잘 어우러지면 춤을 상당히 잘 춘다
-무대가 화려하며, 무대 퍼포먼스가 매력적이다
-가수들의 의상이 개성적이고 안무와 패션이 매력적이다
-음악뿐만 아니라 관련 예능 프로그램이 매력적이다
-댄스와 노래를 합쳐진 다양한 형식이다/장르가 다양하다
-노래에 리듬감이 많다
-멜로디가 특별하다
-즐거운 음악과 좋은 노래가 많다
-템포가 빠른 논래는 신나고 따라부르기 쉽다
-가사가 중독적이다
K Pop은 일정한 내적 원리를 공유한 단일 장르 개념으로 보기 어려운 점이 많다. 그동안 시간의 흐름 속에서 K Pop을 보면 개념과 범주의 외연이 확대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K Pop이 역동적인 현재진행형의 장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K Pop은 태생적으로 글로벌적 요소와 한국적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떄문에 K Pop에서 한국적인 것만 찾아내려고 한다든가 이를 강조하려고 하는 태도는 온당하지 않다. 문화는 기본적으로 생성적이며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K Pop이 노래이기 떄문에 본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가수의 가창력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춤이라든가 퍼포먼스 등 다양한 요소가 결합되어 K Pop의 정체성이 구현되는 것이다.
K Pop의 등장과 전개
K Pop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2000년대에 들어와서이지만, 그것이 어느 날 갑자기 우연히 생겨난 현상은 아니다. 그동안 축적되어 온 대중가요의 문화적 자산의 바탕 위에서 K Pop이 출현하게 된 것이며, 그 가시적인 시점은 1990년대 후반이다.
한류가 본격화하기 직전인 1997년 클론은 중국에서 앨범을 발매했으며, 1999년 베이징에서 공연하며 크게 인기를 얻었다. 2000년 2월 댄스 그룹 H,O.T가 중국 베이징에서 공연하여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2001년 보아는 여러 히트곡을 선보였는데, 2002년 발매한 정규앨범 <Listen to My Heart>는 오리콘 앨범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2003년 베이비복스는 〈I’m Still Loving You로 아시아권에서 크게 인기를 얻었다. 2003년 데뷔한 동방신기는 국내에서 입지를 다진 후 2005년 일본에 진출하여 K Pop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2005년 베이징에서 열린 정지훈의 공연 “Rainy day-Beijing”은 관객 4만 명을 동원하며 큰 성공을 이루었다. 2006년 데뷔한 빅뱅은 아이돌 가수로서의 인기를 누리며 2008년 일본에서 앨범을 발매하고 콘서트를 여는 등 아시아권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그런데 205년~2006년 무렵 한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눈에 띄게 많아지는 양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이른바 ‘혐한류’ 혹은 ‘반한류’로 일컬어졌는데, 이는 한류가 단순한 문화현상으로 인식되기보다는 국가 혹은 민족주의적 요소와 맞물린 측면이 있는 데 대한 반감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한류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시각을 완화하면서 다시 한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이돌 그룹의 K Pop이다. 2009년 아이돌 그룹 동방신기는 한국 그룹 최초로 도쿄돔에서 공연했다. 이후 소녀시대나 카라와 같은 걸 그룹들이 해외에서 인기를 얻었다. 2009년 카라는 <Pretty Girl>로 태국의 ‘AS TV 아시아 팝 차트’에서 1위를 한 바 있다.
아시아권에서 벗어나 활동 범위를 넓히고자 하는 시도도 지속적으로 있었는바, 2008년 보아 2009년 원더걸스의 미국 공연은 아시아권에서만큼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2011년에는 SM엔터테인먼트가 프랑스 파리와 미국 뉴욕에서 ‘SM타운 콘서트’를 개최했으며, 2012년에는 한류 팬들을 대상으로 한 컨벤션KCON이 열렸다.
KCON은 CJ E&M이 2012년부터 전 세계 각지에서 주최하고 있는 한류 축제로, K팝, 드라마, 영화, 음식, 패션, 뷰티 산업 등 다양한 영역의 문화로 구성되어 있다. 콘서트와 컨벤션을 결합한 형태로 진행되는 KCON은 낮에는 컨벤션장에서 한류 문화 전시 및 체험 행사가 열리며, 밤에는 인기 K팝 가수들의 콘서트가 있다. KCON은 2012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어바인에서 첫선을 보인 이래, 2013~2014년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됐다. 2014년부터 중소벤처기업부, KOTRA 등 정부기관과 연계해 중소기업의 해외 진출 기회로 삼음으로써, 한류를 경제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KCON은 2015년에 미국을 비롯해 일본과 제주도에서 열렸으며, 2016년에는 프랑스와 아랍에미리트에서 개최되었다. 그리고 2017년에는 멕시코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리는 등 개최 지역이 전세계로 확장되고 있다. KCON은 2018년까지 18차례 개최되었는바, 한류 문화의 확산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부가가치 창출에도 기여하는 등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기왕의 축적된 성과를 바탕으로 K Pop가수들의 활동 반경이 아시아권을 넘어 그야말로 세계 전역으로 확장해 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바, 2013년 슈퍼주니어가 남미에서 콘서트를 개최하여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공연 활동을 통해 아시아권 이외의 지역에서도 K POP이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성공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공연이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다. <강남스타일>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주목을 받았으며, 2012년 9월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특히 유튜브 동영상 조회수가 20억을 상회하는 등 <강남스타일>이 세운 기록은 경이적이라 할 수 있다. 싸이는 엄밀하게 말해서 아이돌 가수로 통칭되는 K Pop가수의 범주에 든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한국 가요를 부르는 가수라는 점에서 해외에서는 넓은 의미의 K Pop가수로 인식되었다.
싸이 이후 현재까지 주목할 만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가수로 방탄소년단(BTS)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3년 데뷔한 7인조 남성 아이돌 방탄소년단은 활발한 SNS 활동을 통해 폭넓은 팬층을 확보했으며, 한국과 해외 공연을 병행하며 국내외에서 인기를 다져 나갔다. 이러한 행보는 국내에서 입지를 확실히 한 후 해외 공연으로 영역을 넓혀간 기존의 K Pop가수들과 접근 방식을 달리 한 것이다. 방탄소년단은 젊은 세대들의 감성을 가사에 담아 노래했으며, 사회적인 이슈도 적극적으로 노래에 수용하여 공감의 폭을 넓혔다.
방탄소년단이 해외 공연에서 거둔 성과와 인기는 기존의 K Pop 가수들과 차별되는 상당한수준이라 할 수 있다. 방탄소년단은 2015년 11월 자신들의 네 번째 미니 앨범(EP) <화양연화pt.2>를 빌보드 메인 앨범차트 ‘빌보드 200’의 171위에 올려놓으며 미국 시장에서 처음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올렸다. 이후 한국어 앨범 6장과 일본어 앨범 1장 등 총7장의 앨범을 연속해 빌보드 200에 올려놓았으며, 특히 지난 5월 공개한 세 번째 정규 앨범 <LOVE YOURSELF 轉 Tear>는 한국어 앨범 최초이자 아시아 앨범으로서는 최초로 차트1위에 오르기도 했다. 더불어 싱글 차트인 ‘Hot 100’에도“DNA”(67위)와 “MIC Drop”(28위)“FakeLove”(10위) 등의 곡을 진입시켰으며, 미국의 대표적인 음악 시상식 중 하나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는 지난해와 올해 2년 연속으로 ‘톱 소셜 아티스트’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방탄소년단은 대형기획사의 대명사격인 SM이나 YG 그리고 JYP 소속이 아니라 유명 작곡가 방시혁이 운영하는 중소기획사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소속이었기 때문에 데뷔 초기 미디어와 팬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만의 개성적인 음악세계를 구축하며, 2015~2016년 발매된 <화양연화> 앨범 시리즈와 싱글 <Run>, <쩔어>, <불타오르네> 등을 히트시키며 입지를 넓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7년 5월 빌보드 뮤직 어워드 ‘톱 소셜 아티스트’를 수상하는 성과를 보였다.
그런데 방탄소년단은 2014년 미국 내에서 ‘좋아하는 K Pop 아티스트’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등 해외에서의 인지도는 진작부터 높아 있었다. 이러한 활동의 바탕 위에서 2017년 빌보드 뮤직 어워드를 수상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해외에서 먼저 인기를 얻은 후 국내에서의 입지를 넓힌 사례로, 2017년 데뷔하여 미주와 유럽, 특히 남미 지역에서의 선전을 바탕으로 국내에서도 팬층을 확장하기 시작한 카드(KARD)를 꼽을 수 있다. 이는 K Pop의 글로벌화가 더욱 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최근 미국 내에서 인기 있는 K Pop 가수는 다음과 같다.
2014년도 | 2016년도 | |||
순위 | 가수 | 언급 빈도수 | 가수 | 언급 빈도수 |
1 | 방탄소년단 | 199 | 방탄소년단 | 784 |
2 | 엑소 | 119 | 엑소 | 235 |
3 | 빅스 | 99 | 갓세븐 | 150 |
4 | 위너 | 70 | 빅뱅 | 127 |
5 | 갓세븐 | 68 | 샤이니 | 86 |
6 | 수퍼주니어 | 63 | 빅스 | 75 |
7 | 인피니트 | 51 | 몬스타엑스 | 72 |
8 | 빅뱅-태양 | 49 | 블랙핑크 | 70 |
9 | 2NE1 | 47 | 세븐틴 | 65 |
10 | 비스트 | 43 | 트와이스 | 56 |
국내 K Pop 가수 가운데 방탄소년단의 인기가 압도적임을 알 수 있는데, 팬층의 활동상 또한 가수의 홍보에 크게 기여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이들은 뮤직비디오 및 관련 영상에 자발적으로 영어 및 기타 언어 자막을 제공하고, 커버댄스ㆍ반응 동영상 등의 자체 제작 콘텐츠를 공유하며 전 세계 각지의 팬들과 교류하며 온라인상에서 영향력을 높이며 새로운 팬들을 확충해 왔다.
방탄소년단의 해외 시장 성공은 단단한 팬덤의 형성에 음악인 스스로가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그리고 글로벌 팬덤의 힘이 결집되었을 때 국내외 음악 산업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잘 드러내는 사례이다. 방탄소년단이 해외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로 그들의 공식 팬클럽인 ‘아미(ARMY)’의 역할을 꼽을 수 있다. 이들팬클럽 회원들은 방탄소년단의 음악을 즐기고 콘서트에 가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방탄소년단의 성공을 적극 지원했다. 가령 빌보드 차트 선정 기준을 면밀히 분석해 조직적으로 라디오에 방탄 소년단의 노래를 꾸준히 신청하여 차트 순위를 높이고, 이들의 인지도를 높일 수 있는 미국 간판 토크쇼 몇 개를 골라 방탄소년단 섭외를 요청하기도 했다. ‘아미’에는 미국ㆍ유럽 출신 회원 수가 국내 팬과 거의 대등할 정도로 많은데. 이처럼 글로벌 팬층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방탄소년단이 데뷔 직후부터 해외 시장, 특히 미주ㆍ유럽 시장에 눈을 돌려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 온 덕분이다. 그리고 방탄소년단은 국내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할 때부터 CJ E&M이 미국 등지에서 주최해 온 한류 콘서트 ‘KCON’에 지속적으로 참여해왔으며 유튜브 등을 통해 팬층과의 소통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왔다. 이러한 지지 기반이 있었기에 방탄소년단이 해외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방탄소년단은 데뷔 초기부터 힙합을 자신들의 음악적 정체성으로 전면에 내세우며, 그들만의 개성이 잘 담겨 있는 매력적인 음악을 선보였다. 그리고 멤버 전원이 적극적으로 작곡ㆍ작사에 참여했으며, 힙합과 전자 댄스음악이 적절하게 조화되고 균형을 이룬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작품은 역동적이고 화려한 무대 퍼포먼스와 어우러지며 시너지 효과를 내는데 성공했다. 특히 방탄소년단의 음악적 개성과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요소로 ‘스토리텔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발매한 앨범은 상호 밀접하게 연결되는 서사를 지니고 있다. 예컨대 ‘학교 3부작’이라고 불리는 초창기 세 장의앨범은 10대들의 꿈과 사랑, 고뇌 등을 담아냈다. 그리고 이어진 <화양연화> 시리즈는 ‘청춘 2부작’이라고’이라고 불리며 젊은 세대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Love Yourself> 앨범시리즈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기-승-전-결로 풀어 내고 있다. 자신들의 삶을 담고 있으면서 이를 유려한 비트로 표현해 낸 힙합의 강렬함은 언어 장벽을 넘어 해외의 팬층에게 큰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니까 기획사의 기획력이나 마케팅 등 외적 요소도 중요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성을 담보한 노래 작품 그 자체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방탄소년단의 미국 시장 진입은 일회적인 성공 혹은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며, 현재까지 매우 빼어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앞으로 이들의 뒤를 이은 제2, 제3의 방탄소년단이 출현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