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이야기 - 계묘년(癸卯年)을 맞이하여
언제부턴가 알 수 없는 운명의 힘을 느끼면서 세월 가는게 그렇게 애달프지만은 않다. 집착할 것도 움켜쥘것도 없는 삶이지만, 그래도 새로 만나게 될 세상이 궁금하다. 이제 하루만 지나면 계묘년 새해가 시작된다. 계묘년에서 '계(癸)'는 검은색을 상징하며, 검은색은 지혜를 뜻한다. '토끼'의 해를 맞이해서 모두 토끼의 지혜로 풍파를 이겨내고 멋진 삶 가꾸어 가기 바라며, 판소리 <수궁가>를 중심으로 토끼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지혜와 용기로 강자를 물리친 약자, 토끼
토끼는 문학 작품 속에 비교적 빈번하게 등장하는 친숙한 동물이다. 신화에서 토끼는 풍요와 다산, 무병장수를 상징하며, 달나라에 살고 있는 토끼는 불로장생의 영약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민담에서는 몸집 작고 힘이 약한 토끼가 덩치 크고 힘은 세지만 어리석은 호랑이를 꾀로 물리치는 지혜로운 존재로 자주 등장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토끼는 꾀보 혹은 꾀쟁이로 불린다. 물론 토끼가 언제나 긍정적인 이미지만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토끼는 영민함과 지혜로움을 지닌 반면에, 경박함과 교활함도 지니고 있다. 게다가 경계심이 많고 자만에 빠져 스스로 제 꾀에 넘어가기도 한다.
이상향 수궁에 현혹된 세속적 욕망의 토끼
판소리 <수궁가>에 등장하는 토끼 또한 긍정적 이미지와 부정적 이미지를 모두 지니고 있다. 토끼는 기본적으로 약자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별주부가 토끼를 데리고 오기 위해 수궁에서 육지로 나올 때 화공을 불러 토끼의 외양을 그리게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대목이 바로 ‘토끼화상’이다. 음악적으로 매우 경쾌하게 불리는 이 대목은 김찬업 명창과 신만엽 명창의 더늠으로 알려져 있는데, 토끼의 생김새에 관한 실감난 묘사를 담고 있다.
용왕이 살고 있는 수궁이 지배층의 세계라면, 토끼가 거주하는 육지는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약자들의 세계다. 그렇지만 약자들의 세계에도 위계가 존재하는바, 이를 정하기 위해 지혜를 겨루는 것이 바로 ‘상좌다툼’ 대목이다. 날짐승은 날짐승끼리 길짐승은 길짐승끼리 상좌다툼을 벌이지만, 누가 상좌가 되는가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곧이어 호랑이가 등장해 위력으로 상좌를 차지함으로써 힘에 의한 위계 질서를 구현하기 때문이다. 민담의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세고 완력이 있는 호랑이는 토끼의 꾀에 속아 봉변을 당한다. 이와 달리, <수궁가>에서는 호랑이가 별주부에 의해 곤욕을 치르게 된다. 육지의 세계에서 권력의 정점에 있던 호랑이가 곤욕을 치루게 되었다 해도,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 놓여 있는 토끼의 처지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별주부가 토끼를 유혹해 수궁으로 데려가고자 할 때 제시한 것이 바로 ‘팔난세계’다. 이것은 엄동설한의 추위, 배고픔, 덫, 사냥꾼, 조총 화약, 초동목수 등 토끼가 육지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여덟 가지 어려움을 말한다. 협박에 가까운 별주부의 으름장에 토끼의 마음이 흔들린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별주부를 따라 수궁으로 가기로 결심한 것은 토끼의 자만 혹은 경박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토끼의 약점을 집요하게 환기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토끼 같은 풍골이면 수궁에서 좋은 벼슬도 할 수 있다고 꼬드기는 별주부의 언변에 현혹되어, 토끼는 현실 인식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수궁은 태평성세로, 천여 간의 집 ․ 온갖 진귀한 보물 ․ 천하에 없는 진미 ․ 여색과 풍류로 평생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게다가 훈련대장과 같은 높은 지위에 오를 가능성도 있다. 이는 별주부가 토끼를 유인하기 위해 동원한 미사여구지만, 별주부가 제시하는 수궁 세계는 토끼에게 이상향이나 다름없는 공간이다. 토끼가 꿈꾸는 세계는 이 세상과 절연된 고립된 공간에서의 유유자적한 삶이 아니다. 토끼의 욕망은 지극히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것이다. 그가 별주부의 유혹에 넘어갈 수 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기지를 발휘하다
그러나 토끼는 세속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줄 것으로 믿었던 수궁이 더 이상 이상향이 아니라 죽음의 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좌우 나졸 등이 토끼를 포박해 용왕 앞에 대령하자, 토끼는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며 이리저리 둘러대 보지만 더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허 막비운수로구나. 소년대장 못 지내고 이놈 용케 허망히 잘 죽는다.”라고 한탄을 한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토끼는 살아낼 꾀를 생각해 낸다. 간을 육지에 두고 왔다고 하며, 용왕 앞에 배를 내밀며 갈라보라고 한다. 작품 전체 가운데서 단연 압권으로 꼽히는 이 대목은 신만엽 명창과 송우룡 명창의 더늠으로 전해지고 있다. 음악적으로도 가장 잘 짜여진 눈대목이다.
<중모리> 말을 허라니 허오리다. 태산이 붕퇴허고 오성이 음음하야 시일갈상(是日曷喪) 노래 소리 억조창생 원망 중에 탐학한 상주인군 성현의 뱃속에 칠 구무가 있다 허고 비간의 배를 갈라 무고히 죽였은들 일곱궁이가 없었으니 소퇴도 배를 갈라 간이 있으면 좋으려니와 만일에 간이 없거드면 뉘 다려 달라 허며 어찌 다시 구허리까? 당장에 배를 따 보옵소서. 용왕이 듣고 화를 내어, “이놈, 니가 그 말이 당찮은 말이로다. 의서에 이르기를 비수병즉(脾受病則) 구불능식(口不能食)허고 담수병즉(膽受病則) 설불능언(舌不能言)허고 신수병즉(腎受病則) 이불능청(耳不能聽)허고 간수병즉(肝受病則) 목불능시(目不能視)라. 간이 없고야 어찌 눈을 들어 만물을 보느냐?” “예, 소퇴가 아뢰리다. 소퇴의 간인즉 월륜정기로 생겼삽더니 보름이면 간을 내고 그믐이면 간을 드리내다. 세상에 병객들이 소퇴 곳 얼른 하면 간을 달라고 보채기로 간을 내어 만초 잎에다 꼭꼭 싸서 칡으로 동여 위주 석산 계수나무 늘어진 상상가지 끝끄터리 달아 매고 도화유수옥계변(桃花流水玉溪邊)에 탁족(濯足)하려 내려왔다 우연히 주부를 만나 수궁 흥미 좋다 허기로 완경차로 왔나이다.”-정광수 바디 <수궁가> 중
용왕이 간을 임의로 내고 들이는 표가 있느냐고 하자, 토끼는 “한 궁기로난 대변 보고, 또 한 궁기로난 소변 보고, 남은 궁기로난 간 내고들이고 임의로 출입하나니다.”라고 둘러댄다. 마침내 용왕은 토끼의 언변에 휘둘려 결박한 것을 풀어주고 잔치를 베풀어 토끼를 위로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수궁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토끼가 마음껏 수궁 풍류를 즐기다가 육지로 나온다는 점이다. 일시적이나마 토끼는 평소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세속적 향락의 즐거움을 만끽해 본 셈이다. 수궁 풍류에 정신줄을 놓은 토끼는 자신의 처지를 잠시 망각하고 용왕과 수작하다 또다시 위기에 봉착하기도 한다. 대장 범치가 토끼 뒤를 졸졸 따라다니다 뱃속에서 무슨 소리가 나자 “토끼 뱃속에 간 들었다”고 소리를 쳤기 때문이다. 이에 토끼는 “못 먹는 술을 빈 뱃속에다가 서너 잔 부었더니 아마 똥덩이가 촐랑촐랑하는 소리인지 모르것다”고 둘러대 위기를 모면하고,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새삼 깨닫는다. 이렇듯 토끼에게 수궁은 결코 살만한 곳이 못 된다. 수궁에서 세속적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 토끼의 꿈은 백일몽으로 끝나고 만다. 좋든 싫든 그는 여러 위험 요소가 도사리고 있는 육지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비록 여러 위험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토끼에게 허여된 현실적인 삶의 공간은 육지밖에 없다. 흔히 어려운 위기상황을 벗어난 것에 빗대어 ‘용궁 갔다 왔다’고 하는데, 토끼는 말 그대로 용궁에 갔다 온 것이다.
그런데 육지에 살아 돌아온 토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의 목숨을 앗으려는 끝없는 위험 상황이다. 육지에 도착하자마자, 토끼는 살아 돌아온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노래하며 춤추다가 사람들이 쳐 놓은 그물에 걸리는가 하면 독수리에게 붙잡혀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된다. 물론 위기 상황마다 토끼는 꾀를 내어 목숨을 부지하지만, 용궁에서 살아 돌아온 토끼가 육지에서 겪게 되는 반복되는 위기 상황은 사회적 약자가 감내해야 하는 운명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대결구도에 선 토끼와 용왕,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
<수궁가>의 핵심적인 주제의식은 토끼와 별주부 혹은 토끼와 용왕이 벌이는 지혜 겨루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지혜 겨루기는 기본적으로 약자와 강자의 대결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판소리 <수궁가>는 대부분 약자인 토끼가 치명적인 위기 상황을 지혜로 극복하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것으로 결말을 맺고 있다. 이에 비해 용왕과 별주부의 운명은 창본에 따라 약간 상이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용왕이 쾌유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 방식은 창본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이선유본이나 박봉술본 등에는 우연히 쾌유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심정순 창본에는 별주부가 수궁으로 돌아가는 도중 도사에게 신약을 얻어 용왕의 병을 낫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정광수본에서는 토끼가 준 똥을 먹고 용왕의 병이 낫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보성소리 <수궁가>는 예외적으로 이와는 다른 결말을 보여 주고 있다. 용왕이 토끼를 다시 잡아와 간을 먹고 쾌유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왕에 대한 충을 중시하는 이러한 결말은 양반 취향이 강한 보성소리의 이념적 지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독서물화 된 이본까지 논의 대상으로 삼아 살펴보면, 작품의 결말이 더욱 다양하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가람A본과 연경A본에서는 소상강으로 피신한 별주부가 동정호로 정배 온 신하로부터 용왕과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비(二妃)에게 원정을 올린 후 자결을 한다. 국립도서관B본에서 별주부는 면목이 없다는 글을 지어 바위에 붙이고 자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가람B본에서는 용왕이 토끼를 포획하기 위해 육지로 쳐들어오는데, 토끼의 종적을 찾지 못하자 산신령에게 편지를 보내 토끼를 다시 잡아오게 한다는 내용이 장황하게 부연되어 있다. 이처럼 다양한 결말 양상은 토끼와 별주부 혹은 토끼와 용왕의 갈등에 내재되어 있는 치열한 대결 의식의 산물이다. 지배 질서의 중심에 있는 용왕을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꾀로써 위기를 극복하는 약자인 트릭스터 토끼를 지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국 세계를 바라보는 현실 인식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10여년전 국립창극단에서 브레히트의 제자 아힘 프라이어가 연출을 맡아 창극 <수궁가>를 무대에 올려 세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이 작품은 판소리 언어의 묘미를 잘 살리고 창의적인 무대 장치와 의상 등을 통해, 창극이 우리 시대에도 매력적인 공연양식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동물이 등장하는 우화 <수궁가>에 인간세계의 정치 현실을 대입하여 효과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선명한 주제의식을 구현한 점도 주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강자와 약자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며, 약자가 지혜롭지 않으면 강자를 상대할 수 없는 것 또한 세상의 이치다. 우리는 강자의 위치에 있을 때도 있지만, 약자의 위치에 놓여 있을 때가 더 많을 것이다. 약자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토끼의 지혜와 용기다. “자, 배를 갈라 보시오!”하며 용왕에게 자신의 배를 들이미는 당당함이 있었기에, 토끼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 때나 이렇게 하면 애꿎은 목숨만 잃게 될 수 있으니, 용기와 만용의 거리를 잘 가늠할 필요가 있겠다. 삶의 구비마다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위험과 고난을 극복하는 데 있어, 토끼의 지혜와 용기는 시대를 초월하여 언제나 진실이다.